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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처럼 쏟아지는 비행기 폭격을 피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굴다리로 숨어들었지만 여기서도 총알 세례를 받아야 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숱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가운데 유일하게 밝혀진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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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 ④] 복수노조 논란 속 ‘노’ ‘노’ 연대 타결하다! /이창근
희망의 폭풍질주! 소금꽃 찾아 천리길!!
2011년 7월 4일 드디어 역사적인 ‘노’‘노’연대가 성사됐다. 노동자들은 이 땅의 뿌리 깊은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로 다짐했다. 그리고는 먼저 떠나간 민중의 넋 앞에 깊이 머리를 숙인다.
복수노조 문제로 한창 분주한 서울의 양대 노총 사무실도 아니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일하고 있는 울산이나 창원 대공장도 아니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61년 만에 이뤄진 연대의 현장, 이 곳은 바로 충청도 황간면 노근리역사공원 조성지이다. ‘노’근리 희생자들과 소금꽃 찾아 천리길 ‘노’동자의 노노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희망의 폭풍질주! 소금꽃 찾아 천리길 4일차. 오늘은 걸으면서 노근리를 잠시 들렀다.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기총사격의 상흔을 돌아본 후 문득 ‘노근리와 노동자가 만났구나’ 싶어서 말장난을 조금 해보았다. 그러나, 혹시 노근리의 비극 가지고 장난친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꽤 많다. 한번 짚어볼까 한다.
1950년 7월 당시, 노근리 사람들은 하루하루 열심히 땅을 일군 수확으로 자식들을 낳아 기르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터졌어도 순박하게 “그래도 여기까지 난리가 나겠어? 우린 안전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살다가 하루아침에 피난민이 됐다. 그래도 나랏님 말씀 믿고 시키는대로 피난의 길을 나섰다. 며칠만 있다 돌아오리라 믿고 나들이 하듯이 떠났다. 남의 나라 군인들이긴 했지만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이 있으니 더 든든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우방’은 피난민과 북한군을 구분치 않았다. 사살 명령이 떨어지는 동안 대한민국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결국 노근리 양민 300여명은 영문도 모른채 쌍굴다리 안에 갇혀 총알 세례를 맞고 죽어갔다.
2009년 7월 평택 쌍용차 노동자들도 매일 땀 흘려 번 정직한 돈으로 자식들을 길렀다. “먹튀자본이 들어와 신차 개발은 손도 안 댄다, 이러다 회사가 망한다”는 말이 공장 안팎에 돌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만든 차에 애정이 있었고 끝까지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지키고 싶었다. ‘아무려면 나 같은 베테랑 일꾼을 정리해고 시킬까’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쌍용차를 살리겠다던 남의 나라 회사는 조용히 ‘먹’고 ‘튀’었다.
죽음 같은 해고를 피해서 시작한 공장안 피난살이는 길어져만 갔다. 서민을 살리겠다던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같은 방패를 들고 있는 용역과 경찰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개별 사업장에 대한 불개입을 천명한 정부, 공적자금 투입을 요구한 노동자. 결과는 ‘공권력 투입’이라는 역설적 불개입으로 나타났을뿐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 갇힌 채 정리해고의 칼날을 맞았다. 이들 중 15명이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상당수는 파업 이후의 죽음이다. 과연 죽음은 이제 끝났는가? 알 수 없다.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 답변도 하지 않는다.
꽤 그럴싸하지 않은가? 역사적 비극에 휩쓸린 양민이라는 점에서, 그 과정에 외국이 개입했으며 정부는 제 나라 국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오히려 비극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노근리와 정리해고 노동자들은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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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노조 총파업 15일째인 2009년 6월4일 공권력 투입설까지 나오면서 경기 평택시 칠괴동 공장 안팎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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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2011.6.30/한겨레21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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