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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28 19:07 수정 : 2011.08.28 19:07

고종석 언론인

철학자 김진석의 근저 <우충좌돌>을 읽으며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나’를 새삼 되돌아봤다. ‘중도의 재발견’이라는 부제를 단 <우충좌돌>은 <기우뚱한 균형>(2008)의 연장선에서 저자의 정치적 중도 노선을 재천명한다. 책 머리말에 재미난 견해가 보인다. “새는 그저 양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다. 새는 몸통과 양 날개로 난다. 몸통 없는 두 날개가 무슨 소용인가?”

여기서 ‘몸통’이란 물론 저자의 중도 노선이다. 이 인상적인 비유는 재치를 위해 사실을 뒤틀었다. 양력(揚力)을 주로 받는 것은, 아니 차라리 만들어내는 것은 새의 두 날개이지 몸통이 아니다. 몸통 없는 두 날개가 쓸모없을지라도, 날개 없이 몸통은 날지 못한다. 새는 날개로 나는 것이지 몸통‘으로’ 나는 것이 아니다. 보수(오른 날개), 진보(왼 날개)와 대등한 차원의 또 다른 길로서 중도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새의 몸통에 견준 것은 계단을 빗디딘 감이 있다. 몸통은 어떤 정치노선이 아니라, 그 노선을 실천하거나 거기 이끌리는 정치공동체일 것이다. 이런 사소한 트집이나 잡고 있는 것은 내가 <우충좌돌>의 견해에 대체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어섯눈 뜰 무렵부터 나는 내 정치노선을 중도우파 정도로 여겨 왔다. 복지나 경쟁을 화두로 삼아 김진석이 <우충좌돌>에서 펼친 ‘중도적’ 견해를 내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내 자기정향이 그와 멀지 않다는 뜻일 테다. (김진석은 자신을 중도좌파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은 더 벼린 칼날을 좌파 쪽에 들이댄다.) 나는 균형에 이끌린다. 자유와 평등의 균형, 시장과 정부의 균형, 경쟁과 협력의 균형, 일반의지와 사적 선택의 균형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자유지상주의가 초래할 야생적 약육강식 상태가 두려운 만큼이나 평등지상주의가 불러올 억압적 중우정치가 두렵다. 나는 적절한 크기의 시장과 적절한 크기의 정부를 원한다. 요컨대 나도 김진석처럼 좌우의 모든 근본주의가 두렵다.

그런데도 나는 <우충좌돌>을 읽으면서 조금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중도주의자’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불편함이기도 할 테다. 우선 내 중도는 탈역사적이고 탈공간적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지녔다. 18세기 시민혁명기 정치지형에서 내 노선은 명백히 좌익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 한국 정치지형에서도 나는 왼 날개일지 모른다. 한편 20세기 북유럽 정치지형에서라면 내 노선은 갈데없는 우익일 것이다. 나는 막연히 20세기 서유럽 정치지형에 어떤 보편성을 부여하고, 나를 중도우파로 규정해 왔던 것이다. 불행히도 김진석 역시 <우충좌돌>에서 자신의 ‘중도’를 펼쳐보이며, 시공간이라는 변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이 언뜻 보기보다 큰 잘못인 것은, 인류 역사가 인간의 자유를 고루 확산하는 방향으로 끝없이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지금-여기에서의 중도’에 붙박여 있을 때, 그 중도는 역사의 바람직한 방향을 가리키는 벡터에 이르지 못하고 순리를 외면한 몰가치적 스칼라에 머무를 수 있다. 중도가 (의도와 상관없이) ‘위장된 보수’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진석은 또 ‘중도’ 노선이 윤리적 정당성과는 무관하며, 심지어 중도주의자들은 ‘더러운 주체’라고까지 말한다. 유념해야 할 것은 김진석이 이 말을 가치중립적(보기에 따라서는 긍정적) 맥락에 배치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한편, 김진석은 이 책에서 ‘자칭 진보’의 위선을 거듭 나무란다. 불공평하다! 내 눈에도 더러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이 보이고, 그럴 때면 눈살을 찌푸리게도 된다. 그러나 17세기 어느 현자가 일깨웠듯, 위선은 “악이 선에게 드리는 경배”다. 위선은 적어도 악보다는 낫다. 위선은 문명이다. 위선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온갖 숨탄것들의 야만에서 벗어난다. 그 ‘위선’이 세상을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면, ‘자칭 진보’의 위선이 뭐 그리 문제되는가? 우리들 인간 내면의 가장 추악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정화할 계기를 줄 수 있다면, 위선은 다다익선이다.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김진석의 도덕적 까칠함이 조금 무뎌졌으면 한다. 그럴 때 그와 나의 중도도 좀더 당당해질 것이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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