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08 19:30
수정 : 2012.01.0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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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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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남쪽 정부에 대한 북쪽 당국의 비난이 더 뾰족해졌다. 국방위원회에 이어 조국평화통일위원회도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들먹이며 ‘역적 패당’ ‘친미 파쇼광’ ‘만고대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열한 도발’ 따위의 거친 언어를 쏟아냈다. 국방위 성명에서는 방북 조문의 제한에 초점을 두더니, 조평통 성명에선 거기에 더해 우리 군의 경계 태세 강화와 탈북자 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물고 늘어졌다. 이것은 이해할 만하면서도 지나친 호들갑이다. 그것이 지나친 호들갑인 것은,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에 견줘 남쪽 당국이 이번엔 한결 합리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남쪽 정부가 북한 주민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고 민간인 단체들이나 정치인의 조의 표시를 막지 않았을뿐더러 제한적이나마 민간인 조문단 방북을 허락한 것은 지금 정세에서 가능한 최대의 성의다.
사실 관계야 또렷하지 않지만 천안함 사건에 대한 남쪽 여론이 어수선하고 연평도 피격의 기억이 생생한 터에, 남쪽 정부가 공식 조문단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 올라가면 김정일은 1987년 북쪽 공작원 김현희씨가 저지른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그 여객기에 타고 있다 불귀객이 된 이들은 ‘파쇼광’이나 ‘역적 패당’이 아니라 해외에 파견된 건설노동자들이었다. 북쪽 처지에서야 김정일의 죽음이 ‘민족의 대국상’일지 몰라도, 남쪽 정부나 시민들 처지에서는 정신을 어지럽히는 초대형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조문을 했다면 소위 남-남 갈등이 크게 악화했으리라. 물론 남북관계를 지금처럼 어렵게 만든 것은 이명박 정권의 ‘나 몰라라’ 정책이다. 아니, 이 정권은 대북 정책 자체가 애당초 없었던 듯하다. 자신이 당사자라는 걸 까맣게 잊은 채 객석에 앉아서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지난 네 해를 보내온 것이다.
북쪽 태도에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 것은 그 호들갑이 전술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권력이 충분히 다져지기 전에 한반도 상황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을 북한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의 이번 과잉반응은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적 과잉반응이라 해석하는 것이 옳겠다. 확실한 것은, 북한의 과잉 정치공세가 진심이든 전술적이든 이 정권 아래서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은 바라볼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짐은 다음 정부로 넘어간 것 같다. 그사이에 북쪽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밝힌 대로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기 위한 올해의 투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려고 애쓸 것이고, 남쪽은 남쪽대로 백낙청 교수가 명명한바 ‘2013년 체제’라는 것의 토대를 만드는 데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중요한 두 선거에서 남쪽 유권자들이 2013년 체제라 부를 만한 것의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튼튼한 평화 정착이나 중장기적 궁극적 숙제로서의 통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북-미 사이의 사안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남쪽의 대북 정책이 바뀌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통일이 급작스럽게 이뤄질지 단계적으로 이뤄질지, 그 통일이 남쪽이 북쪽을 흡수하는 형태로 될지 아니면 소위 ‘남북연합’을 거쳐 대등하게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남쪽 시민들 처지에서 가장 바람직한 통일은 단계적 흡수통일일 것이다. 사실, 단계적이든 급작스럽든 흡수통일은 남쪽 시민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의 통일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백낙청 교수의 ‘남북연합’이라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관념이거나, 흡수통일의 직전 단계에 조응하는 가설(假設) 통일국가이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흡수통일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허여된 유일한 대북 정책은 포용정책, 곧 화해협력 정책이다.
북쪽이 이 정권에 아무리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도, 이런 상태로 한 해를 허송할 수는 없다. 머쓱할지는 몰라도, 이 정권은 당장 북쪽에 평화와 협력의 신호를 보내야 한다. 유권자들도 거기 힘을 보태야 한다. 올 4월 총선에서 합리적 대북관계를 추구하는 세력이 다수파가 되기만 해도, 이 정권의 대북 정책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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