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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20 19:19 수정 : 2012.05.21 17:00

고종석 언론인

노을, 몇 걸음 산책, 조카와 볼뽀뽀…
남아! 이런 사치를 누려볼 참이야
그리고 ‘수모’의 시대를 준비해야지

그리운 남(湳)!

오늘이 소만(小滿)이야. 알고 있었니? 만물이 생장해 가득 찬다는. 나희덕은 이맘때를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라고 노래했지. 아닌 게 아니라 이즈음의 초록은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어. 시인의 말을 다시 훔치면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여길 지나면 너무 어둡고, 여기 못 미치면 너무 밝은 듯. 득중(得中)이야말로 극한이라는 야릇한 이치를 깨닫게 되네.

남아! 캘리포니아에는 요즘도 비가 내리니? 겨울에만 내리던 비가 봄에도 온다고, 캘리포니아 날씨가 이상해졌다고 네가 투덜거리던 게 떠올라. 네 말을 듣고, 그게 일시적 날씨 변덕이 아니라 혹시 전지구적 기후변화 조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뜬금없이 했어. 어떤 재난영화들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고. 나야 별스런 생태주의자는 못 되지만, 후쿠시마 이후에도 핵에 대한 사람들의 불감증이 여전하다는 건 좀 뜻밖이야. 주류 언론의 게이트키핑 탓인가?

얼마 전, 3012년에는 일본에 열다섯 살 아래 어린이가 하나도 없을 거라는 신문기사를 읽었어. 지금 같은 저출산 추세가 이어지면 그렇게 되리라는 건데, 좀 한가로운 얘기로 들리더라. 천년 뒤까지 과연 인류가 살아남을 수라도 있을까? 일본인이든 아니든. 지금의 진화 속도와 방향을 단숨에 뛰어넘고 거스른 ‘신인류’가 태어나지 않는 한, ‘31세기 인류’라는 건 있을 법하지 않아. 지금도 이 행성 어디선가 아이들이 떼로 굶어 죽어가는 걸 보면 짐작할 만하지.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건 걔들을 살릴 먹을거리가 없어서가 아니잖아. 행성 다른 곳에 쌓여 있는 그 먹을거리가 그 아이들 입에 다다를 수 없도록 하는 정치 탓이지. 그 정치가 잘 관리되지 못해 단 한 번의 커다란 전쟁으로 비화하기만 해도, 인류는 가뭇없이 사라지겠지. 다른 생물들은 무슨 죄니? 외계 지성체 역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가, 어느 영화에서, 이 행성을 인류로부터 구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

보고 싶은 남!

한국 소식을 너도 접하겠지만, 그리 반가운 일은 없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난달 총선 뒤로 며칠 침울했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진심이야. 환호작약할 일도 아니었지만, 마음 상할 일도 아니었어. 그 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사람들 하는 걸 보면 말이지. 특히 통합진보당 사태! 지금도 출구가 안 보이네. 그사이에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정권 끝머리라는 걸 일깨우듯,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부패 스캔들. 가끔 코믹한 장면도 있긴 하지. 수천억원대의 불법대출과 횡령을 일삼던 어느 금융인의 ‘밀항’ 시도! 어느 기자 말대로 다 죽어가던 낱말에 생기를 불어넣더구나.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은 외려 나라 바깥에서 불어오더라. 동성결혼에 대한 오바마의 지지 선언, 그리고 프랑스 대선 소식.

남아! 나잇살이나 먹었으면서도 나는 왜 이리 정치에 집착하는지. 누구 말마따나 정치는 정말 한국인의 히스테린가? 내겐 누려도 될, 아니 누려야 할 생의 정당한 사치가 수두룩한데 말이야. 서해 바다의 저녁노을, 몇 걸음의 산책(양재천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몇 마디의 밀어, 몇 모금의 에스프레소, 몇 움큼의 잔모래, 어린 조카들과의 볼뽀뽀, 몇 줄의 시 같은.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그런 정당한 사치를 누리려 애써 볼 참이야. 그러면서, 박근혜 시대를 준비해야겠어(결국 또 정치로 돌아오는군! 그리고 내 학습된 이 비관주의!). 박근혜 시대를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뜻이야. 그건 아마 수모(受侮) 연습, 해리(解離) 연습이겠지.

네가 사는 곳, 오렌지카운티, 이름이 참 예쁘다. 미국엔 거기 말고도 수많은 오렌지카운티가 있겠지만. 그곳엔 실제로 오렌지 밭이 펼쳐져 있니? 휴대폰에 담긴 네 사진을 가끔 들여다본단다. 고와라! 네 얼굴은 세월을 잊었구나. 나는 거울 들여다보기가 싫은데. 몸이 있는 탓에 이렇게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몸이 없다면 어떻게 너를 만져볼 수라도 있을까? 건강 잘 챙기렴. 보고 싶어 남! 내 친구 얼굴을 만져보고 싶어!

고종석 언론인

[통합진보당 압수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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