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01 19:15
수정 : 2012.07.0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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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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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근간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를 읽어나가다가, ‘어떤 아름다움’이라는 시와 마주쳤다. 이리 시작된다. “(도쿄 어느 대학 교정에서 만난, 보츠와나에서 날아온 녀석은 영양을 닮아 눈이 예뻤다.) 녀석은 카랑가 세츠와나 줄루족의 말을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에이즈를 감기와 비슷한 무게로 말할 줄 아는 실존주의자였던 녀석은 눈이 예뻤다.”
‘에이즈를 감기와 비슷한 무게로 말할 줄 아는’이라는 구절에 내 눈이 멎었다. 그런 사람의 경지를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 아마 보츠와나에는 에이즈가 널리 퍼져 있는 모양이다. 감기 환자만큼이나 에이즈 환자가 많을지도 모른다(설마 그럴까?). 설령 그렇더라도, 에이즈를 감기 정도로 가볍게 여길 수 있다니! 이 시의 화자가 보츠와나 사내에게 붙여준 ‘실존주의자’라는 딱지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세상에는 수많은 가닥의 ‘실존주의’가 있으므로!), 이 눈 예쁜 청년이 어떤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이 보츠와나 청년의 경지를 넘어섰던 한국인 사나이를 알고 있다. 그는 뇌종양을 감기와 비슷한 무게로 말할 줄 알았다. (이렇게 과거형을 쓰고 있자니 참담하다.) 그의 이름은 최성일이다. 최성일은 지금부터 딱 한 해 전, 그러니까 2011년 7월2일 인천적십자병원에서 영면했다. 향년 45. 내가 최성일을 마지막으로 본 건 그가 작고하기 열흘쯤 전 그 병원에서였다. 잠과 꿈으로 삶의 막바지를 견디던 그는, 이따금 눈을 자그마하게 뜨긴 했으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부인 신순옥 선생은 그가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귀띔해주었다. 최성일이 세상을 버린 날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빈소에서, 당연히,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내 두려움의 사다리에서 뇌종양은 에이즈보다 한참 위에 있다. 두개 안에 생기는 종양이라니! 그 종양이 뇌를, 인격의 사령부를 먹어들어간다니! 죽기 직전까지 환자를 제정신으로 놔두는(맞나?) 에이즈보다, 죽음의 임박과 함께 환자의 인격과 감각을 무너뜨리기 십상인 뇌종양을 내가 더 겁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최성일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종양 적출수술을 한 차례 받은 뒤였다. 그리고 그 종양은 언제라도 다시 자라날 것이었다. 그는 배코를 치고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머리를 열어 칼을 대는 수술이라니.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그러나 나는 부러 그의 병이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나는 뱃속도 못 열어봤는데, 최형은 머릿속까지 열어봤군요. 삶의 밀도가 나보다 훨씬 커요.” “머리 열 때부터 다시 닫을 때까진 아무 기억이 없어요. 그러니까 삶의 밀도랑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근데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그 병의 증세는 어때요?” “별거 없어요. 가끔 두통이 나고, 어지러울 때도 있고. 감기랑 비슷합니다.”
생전의 최성일은 ‘출판평론가’ ‘책 평론가’라 불렸다. 그는 갈래를 가리지 않고 제 관심을 끄는 책들을 게걸스레,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그 책들에 대해 ‘평론’을 했다. 종이책에 대한 사랑에서, 최성일을 따를 이를 나는 떠올리기 힘들다. 그는, 나쁘게 얘기하자면, 일종의 ‘책 물신주의자’ 같았다. (책 물신주의자라는 말을 하고 보니, 문득 시인 황인숙과 소설가 장정일이 떠오른다.) 최성일의 책 평론은 세간의 평과 자주 어긋났다. 그는 특히 세상이 깔아뭉개는 책들을 밝은 눈으로 찾아내, 그것들을 자신만의 ‘책의 역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했다. 그의 글들은 <베스트셀러 죽이기>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같은 책들에 묶여 있다.
최성일이 술을 멀리했던 터라, 나는 생전의 그와 깊은 교분이 없었다. 그래도 그의 빈자리가 이리 크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그를 좋아했나 보다. 최성일의 가까운 벗들은 그를 ‘인천의 인문주의자’라 불렀던 모양이다. 그 말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으나, ‘인문주의자’라는 말에선 창백함이나 나약함 같은 것이 연상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최성일은 늘 싱그럽고 활달하고 너그러웠다. 저 너머 세상에서도 여전히 그럴 것만 같다.
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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