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22 19:28
수정 : 2012.07.2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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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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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가을을 ‘등화가친지절’이라 부르지만, 책 읽기 좋은 철은 아무래도 여름이다. 직장인들은 짧으나마 휴가가 있고, 학생들은 기다란 방학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책 다섯권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물론 나는 시인 황인숙씨나 소설가 장정일씨처럼 공인된 탐독가는 못 된다. 젊어서 잠시 뜻을 두었던 연구자도 끝내 못 되었고, 소설가나 기자로서도 얼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내 나이 또래의 평균적 독서인은 되는 듯싶다. 감수성과 지성이 가장 싱그러운 청소년기에 읽은 책들이 대체로 사람들에게 깊다란 인상을 남긴다. 여기 소개할 듬쑥한 책들도 내가 젊거나 어린 시절에 읽었다. 나는 이 글 독자들을 10대 끝머리나 20대 첫머리의 젊은이들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책읽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Word Power Made Easy〉(노먼 루이스):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이 책은 영어 낱말 학습서이다. 실용성도 그리 크다 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지 않는 ‘낡은 낱말들’도 적잖이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원을 중심으로 영어 낱말들의 세계를 주유하는 이 책은 내게 처음으로 지적 충격을 준 책이다. 나는 10대 후반에 이 책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어(를 포함한 현대유럽어)에 ‘그레코로마니즘’이라 부를 만한 문화유전자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좀 구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책은 ‘태서(泰西)문화 입문’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김우창): 한국 최고의 생존 인문학자라 할 저자의 첫 평론집이다. ‘현대문학과 사회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그 바탕이 문학비평서지만 문학 바깥 공간에도 뾰족한 시선을 건넨다. 뒷날 저자의 라벨이 된 ‘심미적 이성’(비록 이 개념의 저작권은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에게 있지만)의 뿌리가 이 책에 박혀 있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에서는 미학과 논리에 대한 살핌이, 실존과 가치에 대한 성찰이 완미하게 얽힌다. 내용도 형식도 이성과 감성을 아울러 휘젓는다. 김우창의 문체는 강철 같은 사유인의 문체이자, 흐르는 물 같은 예술가의 문체다.
<화사집>(서정주): 시중 서점에서 이 얄팍한 시집을 따로 구하기는 어려울 테다. 그러니 <서정주 시전집>을 사서 <화사집> 부분만 읽어도 좋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말은 이제 글 좀 쓴다는 장삼이사 아무한테나 붙이는 상투어가 돼버렸지만, 이 오마주를 진실무위한 차원에서 독차지할 자격이 있는 한국어 화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서정주다. <화사집>은 그의 첫 시집이다. <화사집>을 읽는 것은 한국어의 관능 속에 깊이 잠겨 그 속살을 더듬는 것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도 전율하지 않는다면, 제 한국어 감각을 의심해 보는 게 좋다. 열번이고 백번이고 읽어라. 모국어가 얼마나 아리따운지 알게 될 거다.
<공산당선언>(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책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쉽고 가장 선동적인 책이다. 바로 그 때문에, <공산당선언>은 한 세기 이상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의 시작(유령 하나가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과 끝(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은 독자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통독을 권한다. 낡고 일그러진 세계관이다. 나도 이 책의 세계관에 공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고전이다! 또 이 19세기 책에서, 바로 지금의 자본주의에 대한 몇 줄기 통찰이 읽히기도 한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칼 포퍼): 앞 책에 대한 해독제다. 이 책을 먼저 읽어버리면, <공산당선언>이 재미없어진다. 읽으려면 <공산당선언> 뒤에 읽는 것이 좋다. 포퍼의 날카롭게 벼려진 언어의 칼이 이 책에서 겨누는 것은 플라톤과 헤겔과 마르크스다.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전체주의의 이념적 두목들이다. 누군가의 말을 좀 고쳐 훔쳐오겠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고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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