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9.02 19:15
수정 : 2012.09.0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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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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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과 2002년 두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중도자유주의 세력이 이긴 것은 많은 변수가 개입해 일어난 기적이었다. 디제이피(DJP) 연합, 이인제 출마, 외환위기라는 ‘우호적’ 환경에서도 김대중은 이회창에게 신승했다. 노무현 역시 ‘정당정치에 반하는’ 정몽준과의 극적 단일화, 행정수도 건설 공약에 따른 충청권 유권자들의 회심, 미선·효순양 사건이 촉발한 반미감정의 돌출적 확산이라는 ‘우호적’ 환경에서도 이회창에게 가까스로 이겼다.
그 직전과 그 직후의 대선을 보자.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정주영의 출마로 보수 표가 나뉘었는데도 김영삼에게 패배했다.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은 2위 득표자라는 말이 머쓱할 만큼 큰 표 차이로 이명박에게 졌다. 이것은 한국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이, 특히 대선에서의 투표성향이 압도적으로 보수적임을 뜻한다.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탓해봐야 소용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돌발변수가 없는 한 중도자유주의 세력이 대선에서 보수세력을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1990년의 소위 3당 합당 이후 중도자유주의 세력은 보수세력에게 포위되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길 가능성이 가장 큰 후보는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새누리당의 박근혜다. 누가 민주통합당 후보가 되든 박근혜의 철옹성을 깨기는 어렵다. 그런데 중요한 돌발변수가 생겼다. 안철수다. 그는 지난 대선의 문국현과 달리, 보수세력의 대표자와 맞먹는 지명도와 지지율을 누리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제 뜻에 어긋나게 노무현을 도와준 정몽준과 달리, 이념적으로도 중도자유주의 세력에 사뭇 가깝다. 다시 말해, 다가오는 대선에서 안철수는 중도자유주의 세력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거나, 그 자신이 중도자유주의 세력의 대표자다. 그렇다면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한 중도자유주의 세력이 안철수를 데면데면히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외방인’ 안철수에게 정권을 주느니 차라리 ‘정치권 동료’ 박근혜에게 정권을 넘기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안철수를 껄끄럽게 여기는 것이 민주통합당 예비후보들만은 아니다. 사회학자 장덕진은 지난 5월 <한겨레>에 쓴 칼럼 ‘안철수, 그 허락된 욕망’에서 박근혜 지지자와 안철수 지지자가 절반 넘게 겹친다며, 그들의 특징이 물질주의적 욕망 추구라고 지적했다. 장덕진의 말대로 박근혜와 안철수의 지지기반이 겹친다면, 그것은 안철수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안철수가 중산층 계급투표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즉 장덕진도 인정했듯, 안철수는 박근혜 지지자들을 빼앗아올 수 있다. 그런데 장덕진의 주장처럼, 지지자들의 특성(물질주의)이라는 정치 수요 측면에서 볼 때 박근혜 대통령 세상과 안철수 대통령 세상이 별로 다르지 않을까? 우선, 장덕진이 박근혜와 안철수의 겹치지 않는 지지층을 가벼이 봤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절반 가까운 그 견결한 지지자들은 두 세상을 사뭇 다르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겹치는 지지층 비중이 크다 해서 박근혜 대통령과 안철수 대통령이 어금지금할까? 그것은 박근혜라는 기호에 집적된 온갖 역사성을 거세한 판단이다.
대의제 정당정치를 중시하는 정치학자들도 안철수를 꺼린다. 이 정치학자 집단을 대표한다 할 최장집은 지난주 ‘책임정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칼럼에서 “필자는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 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의제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오랜 신념을 생각하면 조금도 놀랍지 않은 발언이다. 그런데 최장집의 지지 조건을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후보는 박근혜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두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과연 대의제 정당정치가 민주주의의 핵심인가? 장기적으로도 그럴 것인가? 얼을 빼놓을 만큼 빨리 진행되는 아이티(IT)혁명으로 현실 속 공간적 격절이 무의미해지고 있는 추세를 볼 때, 최장집의 신념이 옳은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아가, 이번 대선에서 ‘정당주의자’를 뽑는 것이 박정희 18년 철권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까지 실천해야 할 만큼 중요한가? 공감하기 어렵다. 재림 박정희의 집권이 임박해 보이는 지금, 안철수는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다.
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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