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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앞에서 젊은 시절의 기마타 마코토와 함께 웃고 있는 케니 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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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기마타 마코토의 재즈 스토리
③ 한국 투어 앞두고 잠든 케니 드루
잠들지 않을 음악세계를 추억하며
1980년 봄, 도쿄 시나가와의 한 호텔에서 한 피아니스트를 만났다. 내가 오랜 세월 앨범 제작을 맡았고, 내가 프로듀서로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케니 드루였다. 처음에는 그런 관계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케니가 ‘조니 그리핀 콰르텟’의 일원으로 일본에 왔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만났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재즈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내가 추구하는 ‘재즈는 편안한 선율’과 딱 맞았고, 상당히 재미있는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직감했다.
1980년대 초입. 당시는 전위파가 등장하여 혼돈스러웠던 1960년대, 재즈와 록의 크로스오버 음악이 등장했던 1970년대를 거치면서 재즈가 어떻게 변해갈지 예상할 수 없는 때였다. 특히 전위파는 기존 재즈의 개념을 타파해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론을 모색했고,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적잖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지나치게 과격해 재즈 팬들에게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만을 남기게 된다. ‘재즈는 철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이러한 경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전위파 재즈는 자연도태되었고, 재즈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하지만 1980년대는 오랜 시간 쓸쓸한 시대를 지내온 ‘스트레이트 어헤드’가 재인식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때 일본 재즈시장에 등장한 이들이 ‘케니 드루 트리오’였다. 그는 버드 파월과 맥을 같이하는 하드 밥(Hard bop) 피아니스트로,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어느 정도 인정받은 음악가였다. 1980년 봄 그에게 앨범 제작을 제안했더니 케니로부터 긍정적 답이 돌아왔다. “나는 매트릭스라는 레이블을 갖고 있지만, 기마타씨가 프로듀스한 작품을 매트릭스 레이블로 유럽에서 발매할 수 있다면 꼭 함께 해봅시다.” 나 역시 답장을 보냈다. “단 한가지, 저에게는 제가 추구하는 레이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즈는 편안한 선율’이라는 콘셉트입니다. 흐르는 음악이 방해가 안 되고 귀에 거슬리지도 않고, 들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들으면 충분히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재즈, 그런 레이블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만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재즈는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경쾌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하죠. 그런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재즈의 재미있는 점이죠. ‘어떻게 하면 그런 표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나는 항상 그런 생각으로 피아노를 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해 11월 케니와의 첫 작품 <애프터눈 인 유럽>이 탄생했다.
전위파 재즈 도태된 때 케니 드루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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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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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에서 케니와 나는 추억이 많다. 1983년 6월 <판타지아>(사진)의 리코딩을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코펜하겐에 경마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유를 즐기던 나는 “경마장에 가본 적 있냐”고 물었고, 그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를 설득해 결국 둘이서 경마장으로 향했다. 경주 전 패덕(말의 상태를 살피는 곳)을 들렀지만, 우리 둘은 당연히 말을 보는 안목이 없었다. “3번 말이 이길 것 같은데.” 케니가 말했다. “5번과 8번도 강할 듯한데.” 내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우리는 말없이 말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케니가 말했다. “마코토!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요. 1번부터 8번까지 전부 사는 거죠.” 케니의 발상에 기가 막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전부 사면 말을 고르고 예상하는 재미가 없잖아요.” “하지만 모두 잃지는 않죠.” 결국 8마리를 모두 사서 1000엔이 조금 못 미쳤다. 결과는 5번 말이 이겨서 배당금은 300엔 정도 되었다. “이겼다! 5번 말이 이겼어요, 마코토도 이겼어요?”라며 케니는 아우성이다. “그래도 결국 손해잖아요.” 내가 말했다. “상관없어요. 약간의 손해로 끝나서 다행이잖아요.” 황당한 케니의 일면을 봤던 그리운 추억이다. <판타지아>는 그 뒤 반년 만에 5만장이 팔려나갔다. 마일스 데이비스도, 빌 에번스도 이루지 못했던 기록일 것이다.
케니는 도수 높은 술을 즐겨 마셨다. 그중에서도 위스키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였다. 언제나 행복한 표정으로 즐겼다. 그런 그도 리코딩이 시작되기 10일 전부터는 금주를 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알코올 효과가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죠. 자신의 음악을 순수한 기분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위험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밤새 마시고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아요.(웃음) 하지만 리코딩에서는 갈고닦은 집중력이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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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 드루 트리오의 연주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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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마니아지만 녹음 열흘 전부턴 절대 금주
어느 날 나는 케니에게 그의 음악에 대해 여러 가지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것만은 꼭 지키고 싶다’, ‘이런 부분은 충분히 신경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뭔가가 있나요?” “우선 테크닉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거죠. 프로 피아니스트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초기교’라고 말하는 테크닉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잘 숨기고, 누구나 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할 표현 방법이 있을까 연구해요. 이것이 내 연주에 있어서의 신조이기도 하죠. 그리고 하나 더, 음과 음의 사이, 즉 음간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 음간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거 정도라고나 할까요?”
1993년 3월 케니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마코토,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이 있어요. 실은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유감스럽게도 5월 리코딩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리코딩 일정을 조금 연기해 주었으면 해요. 8월에는 아마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을 일본과 한국 투어는 아마도 무리일 것 같아요. 의사가 약을 추천해 주었는데 부작용으로 손가락 움직임이 나빠질 위험성도 있을 수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중이에요. 그런 사정이니까 아무쪼록 이해해 주세요. 케니로부터.
마지막 편지였다. 1993년 8월4일 코펜하겐 시내 병원에서 그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8월5일 닐스(케니 드루 트리오의 베이시스트)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그때 뉴욕에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은데 하루만 연장할 수 없을까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어려워요. 마코토씨가 보내주신 꽃은 케니에게 헌화하도록 할게요. 뉴욕에서 애도해 주세요.” 닐스가 말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그해 10월 코펜하겐을 방문해서 그의 무덤에 꽃을 바쳤다. 그의 묘비에는 ‘Kenny’s Music Still Live On’(케니의 음악은 여전히 계속된다)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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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타 마코토의 재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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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돌아와서 얼마 있지 않아 케니의 아들 케니 드루 주니어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의 피아노 위에 ‘파시오나타’(Passionata)라는 미완성 악보가 있어요. 이것은 어쩌면 다음 작품의 신곡이 아닌지요?” 5월 리코딩 예정이던 앨범 타이틀이었다. “주니어, 아버지 신작 ‘파시오나타’를 완성시켜서 헌정앨범을 리코딩하지 않겠나?” 주니어는 “꼭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2년 뒤인 1995년 2월 케니의 추모앨범 <파시오나타>가 완성됐다.
글 기마타 마코토/재즈 음반 프로듀서·사진 제공 컨텐츠팩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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