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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20 11:25 수정 : 2011.10.20 11:25

기마타 마코토의 재즈 스토리

[esc] 기마타 마코토의 재즈 스토리
④ 비운의 재즈맨 쳇 베이커,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마침 벚꽃이 피는 계절도 끝나가는 1985년 4월 어느 날 네덜란드에서 전화가 왔다. 유럽에서 일을 돕던 빔 비흐트였다. “쳇 베이커에 흥미 있어요?” “전설적인 뮤지션이니만큼 흥미가 없지는 않지만 왜 그러시죠?” 내가 물었다. “사실은 리코딩 제안이 있어서요.” “그는 리코딩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클럽에 출연하면 거의 테이프를 튼다던데요.” 내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죠…. 사실은 쳇이 일본에 가고 싶어 해요.” “일본 프로듀서와 일을 하고 싶다는 건가요? 하지만 마약과 관련된 얘기들이 너무 알려져 있어서 일본에 들어올 수 있을지….” “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아르시에이(RCA)와 타임리스레이블의 합동 제작으로 한 장 만들어 줄 수 없겠어요?”

쳇 베이커는 1950년대에 마일스 데이비스를 능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트럼피터로,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릴 정도로 멋진 용모와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사운드로 재즈계에서는 드물게 아이돌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왜 자학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인생을 걷게 되었을까?

1952년 당시 재즈계의 최고봉에 서 있던 찰리 파커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단번에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 후 제리 말리건의 그룹에 참여해 착실하게 재즈 트럼피터로서의 지위를 굳혀 가게 된다. 1953년에는 전설이 된 <쳇 베이커/싱스>를 리코딩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1955년에는 카네기홀에도 출연하는 등 인기가 재즈 팬의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특히 그의 보컬은 많은 여성들이 듣고 도취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입증하는, 보사노바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쳇 베이커의 노래가 나의 보사노바 창법을 확립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모른다. 부드러우면서 마음에 스며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나른함…. 그것이 보사노바의 본질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주앙은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에게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다. “당신과 나와 쳇 베이커 셋이서 트리오를 만들어서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를 계속 부르면 세상의 커플들은 모두 행복해질 거야.”

그런 그가 왜? 나는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왔던 뮤지션들에게 꽤 깊은 질문을 하곤 했다. 케니 드루, 맬 월드론, 아트 블레이키, 프레디 허버드 등. 그중에는 마약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쳇 베이커에게도 단단히 마음먹고 물어봤다. 아마 2번째 리코딩이 끝나고 갔던 네덜란드 몬스터르에 있는 중국요리집에서였을 것이다. 솔직히 그에게 마약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상당히 망설였고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이런저런 잡담을 한 뒤 결국 이야기를 시작했다.

술·담배처럼 손댄 마약, 자학의 시작이었나


“어떻게 마약에 손을 대게 됐나요?” “내가 재즈계에 있던 1950년대엔 (마약 복용이)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어요. 선배들 대부분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마약도 가지고 다녔어요.” “계기는?” “잊어버렸어요. 내가 좋아했던 피아니스트 딕 트와르직과 유럽 투어에 나가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건 확실해요. 유럽은 뉴욕보다 질이 좋은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어서 “지금은 어때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다.

쳇 베이커는 마약과 가정불화 등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쳇, 50년대에는 마일스를 능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재즈계의 아이돌이라고 불렸다죠?” “난 그런 자각이 없었어요. 그때 이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에도 지금도 같은 기분으로 담담하게 음악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에요. 그런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쁘고… 어떤 세계든 찬반 양론이 있어요.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여러가지 변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여러가지 있었죠. 가정도 없어졌고 이도 없어졌고…(웃음) 하지만 이것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할 뿐이에요. 그러면 먹고살 수는 있어요. 올해(1986년)는 일본에도 갔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나요?” 내가 물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한 사람이라도 즐겁다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요.” “미국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좋은 추억이 없어서인가…?” 내가 쳇과 깊은 대화를 나눴던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비운의 재즈맨’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파괴적, 자학적인 일생을 보낸 보기 드문 뮤지션’이라고도 한다. 그의 음악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들으면 납득이 가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면서 마약과도 같은 여운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신기한 면이 그의 음악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넷 콜먼이 이런 얘기를 했다. “노래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데 마음에 남는…. 도대체 뭘까 그의 노래는.” 확실히 쳇은 장래를 촉망받았던 것만큼 그 이후의 삶과의 낙차가 너무나 커서인지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웬 참견이야, 내버려 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며 아이돌로 추앙받던 젊은 날의 쳇 베이커.
그는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 음악을 ‘애수’(哀愁)라든가 ‘앙뉘’(ennui·권태를 뜻하는 문예 용어로 생활에 대한 정열을 상실한 따분한 정신상태)라는 말로 극찬을 했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그런 감상적인 의식도 없었던 게 아닐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에게서 받은 솔직한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스트링스 오케스트라와 협연 앞두고 벌어진 비극

내가 쳇과 만났던 것은 그의 만년, 불과 3년 정도였다. 처음에 이야기가 들어왔을 때는 그의 리코딩에 대해서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리코딩을 각지에서 했고 그것도 상당히 질이 좋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였다. 하지만 결국 3장의 앨범(<싱스>, <러브 송>, <싱잉 인 더 미드나이트>)을 제작했고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름 마음에 드는 앨범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장, 콤필레이션 앨범이 있다. 이 기획에는 뒷얘기가 있다. 1987년 일본에 왔을 때의 일이다. 다음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에서 그는 “스트링스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연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런 얘기가 진행돼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픽업 멤버를 기용하기에 이르렀다. 타이틀은 <마이 페이버릿 송스>. 녹음은 1988년 7월 아니면 8월이었다.

1988년 2월 어느 날 네덜란드에서 전화가 왔다. “편곡도 끝났고 괜찮은 얘기가 있어요. 하노버의 라디오 방송국이 특별 방송을 편성하고 싶다고 해요. 리허설에 이 리코딩 기획을 그대로 얹을까 해요. 뒤에는 하노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4월에 수록할 거예요. 기대하세요.” 수록이 끝난 다음달 5월13일, 설마 그런 비극(암스테르담에서의 투신자살)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의 기획은 하노버 라디오 방송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쳇은 갔지만 그가 완성을 학수고대했던 기획을 우리도 실현시키고 싶었다. 결국 내가 프로듀스한 것들 중 사용하지 않은 테이크에서 좋은 것들을 골라 <쳇 베이커 위드 스트링스>라는 타이틀로 발행하게 되었다.

쳇도 드디어 마약에서 해방되어 한숨 놓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글 기마타 마코토·사진 제공 컨텐츠팩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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