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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27 10:59 수정 : 2011.10.27 10:59

기마타 마코토의 재즈 스토리

[esc] 기마타 마코토의 재즈 스토리
⑤ 마지막회. ‘재즈=편안한 선율’ 증명하려 콘셉트 잡고 신인 발굴

‘잠재력이 높은 싹수가 있는 젊은 뮤지션을 찾아내서 키우고 싶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을 발굴해서 스타로 키우고 싶다….’

프로듀서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법이다. 이는 또한 프로듀서의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다. 나도 1980년대에 케니 드루 트리오, 토미 플래너건 슈퍼 재즈 트리오 등 나름대로 히트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신인을 육성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의 젊은 신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운 좋게도 케니 드루나 아트 블레이키뿐 아니라 프레디 허버드, 베니 골슨, 쳇 베이커 등의 다수의 히트 앨범을 발표했고,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매되었다. 재즈 프로듀서로서의 지명도도 상당히 높아져 갔다. 그런 시기여서인지 젊은 뮤지션들의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모여들었다.

1980년대 중반 그 무렵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트리오가 자아내는 분위기와 이 트리오의 앨범 이미지도 명확하게 내 마음속에 그릴 수가 있었다. 무릎을 쳤다. ‘맞아!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를 만들자! 유럽에서 자신들만의 재즈를 열심히 키우려고 노력하는 젊은 음악가들을 찾자!’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지난 9월 공연 모습. 이들은 9년째 해마다 한국을 찾아 재즈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이미지는 ‘유럽의 귀공자들’.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친근함을 줄 수 있는, 젊은 여성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세련된 재즈, 그야말로 ‘편안한 선율 재즈’를 증명하는 트리오라는 콘셉트였다. 하지만 피아노 트리오인지 기타를 중심으로 한 트리오인지도 정하지 않은 채 음악가를 찾아 나섰다. 이름과 콘셉트만을 앞세운 것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트리오의 중심이 되는 음악가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의 이미지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누구와 함께할지 최종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름을 정하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네덜란드의 파트너였던 빔 비흐트가 3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카럴 불레이, 프란스 후번, 로이 다퀴스였다. 사진과 함께 ‘이들은 암스테르담을 거점으로 같이 연주하고 있는 그룹이고 서로 호흡도 잘 맞는다’는 내용의 메모와 그들의 음원도 보내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외모와 재주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의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와 상당히 가까웠다. ‘좋아! 이걸로 가는 거야!’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노르웨이의 숲
앨범의 방향도 머릿속에서는 대충 윤곽이 잡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노르웨이의 숲>(사진)이었다.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이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내가 생각했던 앨범 이미지의 타이틀과도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1989년 봄에 발매된 데뷔 앨범은 대성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인기가 있었기 때문인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히트였다.

1989년 데뷔 앨범 대성공…90년대부터는 클래식을 재즈로

이렇게 되면 두번째 작품에서 이들의 가치가 평가를 받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에 편승한 우연한 히트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내 심복으로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온 하라 데쓰오 디렉터(현 비너스 레코드의 사장 겸 프로듀서)와 검토를 거듭해서 정해진 앨범 타이틀이 <스웨덴의 성>(Chateau en Suede)이었다. 내 발상은 북유럽 3부작이었는데 같은 시기에 케니 드루 트리오도 유럽 3부작(<파리북역 인상>, <유럽 기행>, <여정의 끝에>)을 기획해서 진행중이었다. 그 히트가 이번 앨범에도 이어졌으면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렇게 발매한 두번째 작품도 데뷔 판을 뛰어넘어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인기는 일본 안에만 머물렀고, 미국과 그들의 본거지인 유럽에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지만 데뷔한 지 4년 정도 지난 어느 날 피아니스트 카럴 불레이가 “퓨전 쪽, 일렉트릭 사운드에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리는 이미지와 맞지 않았고, 그런 참에 그들은 활동을 끝내기로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었다. 어떤 평론가는 “재즈 트리오로 부르기에는 너무 약하다. 세련된 이지 리스닝 뮤직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기마타 재즈는 재즈의 본질을 잃고 있다. 상업주의에 치우쳐 있고 팔리기만 하면 다가 아니다. 재즈 레코드가 2만~3만장씩 팔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도 했다.

어떤 비판을 받아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결코 거기에 반론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프로듀서로서의 신념이다. 작품을 사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따로 내가 반론을 하지 않아도 그 평가는 시장이 무너뜨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2대 피아니스트 마르크 판 론의 연주 모습.

20년 재즈 프로듀서 인생의 큰 자랑이자 훈장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 해산 뒤 2년 정도 지난 추운 어느 날이었다. 로이와 프란스는 “재결성할 수 없는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찾았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들이 찾아낸 피아니스트는 마르크 판 론이었다. 녹음을 들어보니 역량은 문제가 없었다. 외모도 준수했다. 단지 재결성한다면 분위기와 색깔을 바꾸고 싶었다. 카럴 시절의 분위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말하자면 정통 피아노 재즈와 같은 타입이었다. 예상치 못한 멜로디를 그려 내는 의외성도 있었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교도 부리는, 말하자면 화려한 트리오였다.

다른 표정의 트리오로 만들고 싶었다. 베이스와 드럼은 피아노가 자아내는 표정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면서 마르크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려니 예전과는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의 피아노는 정돈되어 있었고 서정적이면서 냉정하게 자신의 음악과 마주하는 타입이었다. 카럴이 표현하는 뜨거운 감동과는 또다른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특히 멜로디를 연주하는 음색에는 투명함이 있어서 아름다웠다. 새로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를 탄생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그들에게 연락을 했다. “오케이! 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를 만듭시다!”

1995년 6월 재기작은 <메모리스 오브 리버풀>이었다. 비틀스에서 영감을 얻은 앨범이었다. 하지만 또다른 생각도 들었다. ‘마르크의 잠재력을 좀더 발휘시키려면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클래식 명곡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다. 그렇게 나온 앨범이 <이모털 빌러브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 21번을 편곡한 노래가 포함됐다. 이후 그들의 손에 클래식 명곡이 차례차례 재즈로 만들어졌다. 역시 찬반양론이 있었지만 진심 어린 평론가들은 새로운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에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었다. 어떤 평론가는 “기마타 마코토도 멤버로 봐야 한다. 그는 연주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 하나의 테이스트가 플러스되고 표현에 일종의 색깔이 반영된다.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재즈 유닛은 없었다”고 의견을 냈다. 다른 평론가는 “기마타가 하면 그 뮤지션에 새로운 특성을 더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맛을 표현하게 만든다. 마치 마술사와 같다”고 칭찬해줬다.

클래식 레퍼토리를 접목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나의 의도를 마르크, 프란스, 로이가 나름대로 소화해서 훌륭하게 재생해 주었다. 지금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 중국에도 팬이 늘었다. 특히 한국에는 매년 투어를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렇게 길게 함께한 재즈 그룹은 ‘아트 블레이키 앤 재즈 메신저스’ 외에는 없었다.

20년 정도 지나면 어떤 음악에도 황혼이 온다. 지금까지 내가 제작한 앨범은 25작품. 20년이라는 궤적을 남기고 이대로 막을 내려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 단계로 눈을 돌려 새로운 스텝을 밟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는 틀림없이 내 꿈을 이뤄주었다는 것이다. 나의 프로듀서 생활에서의 큰 훈장이고 또한 프로듀서로서 나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끝>

글 기마타 마코토/재즈 음반 프로듀서·사진 제공 잎섬, 컨텐츠 팩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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