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10 14:05
수정 : 2011.11.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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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란드의 도로에서 만난 캠핑카와 자전거 여행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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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C+Y의 자전거 타고 핀란드 한바퀴
⑤ 마지막회. 숲속 코타·협곡 오페라하우스…별천지에서 맛본 유별난 기쁨
라플란드(유럽 최북단 지역의 통칭)까지 달려오느라 조금 지쳤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 중 최북단인 이나리까지 버스로 이동한 뒤 자전거를 이용해 천천히 내려오기로 계획했다. 왠지 페달을 밟을 때 내리막을 달리듯 기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미예르비에서 이나리까지는 버스로 5~6시간 거리. 버스 안 가득한 귀여운 핀란드 소녀들의 재잘대는 소리에 곧장 노곤한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버스는 사리셀케 국립공원 근처를 지나 핀란드에서 보기 드문 산으로 이어진 도로를 달리고 있다. 케미예르비에 비해 인적이 드물고 도로의 폭은 좁아진다. 대신 여기저기 보이는 캠핑카의 수가 늘어났다.
잠이 덜 깬 채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순간 버스가 속도를 줄였다. 무심결에 내다본 창밖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의 한 장면인 듯했다. 길가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순록들이 풀을 뜯고 있다. 카메라를 꺼내들지만, 아까운 순간을 놓쳤다. 그런데 잠깐 뒤, 또 잠깐 뒤, 순록들은 계속해서 차창 밖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나리로 가는 버스는 순록 사파리를 방불케 한다. 카메라를 꺼내들지 않은 사람들은 라플란드가 고향인 핀란드인들뿐이었다. 순록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카메라 플래시는 연이어 터지지만 아름다운 아가씨인 버스기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헬싱키를 벗어나 도로를 달릴 때부터 순록 출현을 주의하라는 표지판은 숱하게 나타났지만 실제로 만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라플란드의 표지판은 곰과 여우의 출현까지 경고한다. 이 지역 가이드북은, 라플란드 순록이 이 지역 총인구의 세 배나 된다고 전한다.
C의 그곳 → 루오스토 숲속 사우나, 순록과 함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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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조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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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숙소를 빠져나와 페달을 밟는다.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다. 젊은 친구들이 또 호숫가에서 광란의 밤을 즐겼나 보다. 길가에 깨진 맥주병들이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는 루오스토. 겨울엔 스키장이 유명하고 국립공원까지 있는 만큼 관광지 냄새를 물씬 풍기는 작은 마을. 이곳은 핀란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굽이치는 산길이 이어진다. 힘들게 오른 오르막 끝에 오랜만에 내리막이 등장한다. 오늘은 유난히 길가에서 많은 자전거여행자들을 만난다. 멀리서라도 손을 흔들며 여행자들끼리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당신도 사서 고생하고 있군요’라는 동병상련의 표시.
소단퀼레를 출발한 지 다섯시간 만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 루오스토에 도착했다. 평온한 여름의 불청객 모기는 우리가 자전거에서 내릴 때마다 일삼아 공격한다. 때마침 루오스토의 마트에서 요상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모기 관련 상품들이다. 종류가 하도 많아 점원에게 물어보니 스프레이 타입, 로션, 오일 등 종류가 다양하단다. 그런데 주로 살충제가 아니라 모기가 피해가도록 몸에 바르는 약이 인기란다. 하긴 그 많은 걸 무슨 수로 죽이랴. 진작에 하나 사둘 걸 그랬다. 거금 5유로를 들여 오일 타입을 하나 구매했다. 마트를 나서자마자 다시 모기떼가 달려든다. 오냐, 이놈들. 그 자리에서 아낌없이 발랐다. 향기도 촉감도 좋다. 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확실히 잦아든다.
마트에서 얻은 루오스토~퓌헤 지역의 가이드북으로 이 동네에는 저렴한 숙소가 없음을 깨달았다. 관광지라 그런지 대부분 숙소가 200유로를 호가했다. 각오는 되어 있다. 기왕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라면 가장 좋아 보이는 곳이 좋겠지.
가이드북에서 고른 호텔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9월부터 연단다. 라플란드의 국립공원들은 겨울에 스키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상대적으로 여름은 한산하다. 그다음으로 좋아 보이는 호텔로 향한다. 안내 데스크엔 다행히 직원 한 명이 나와 있다. 방이 있냐고 물으니 호텔은 여름 시즌에는 운영하지 않고 원한다면 코타(Kota)를 빌려줄 수 있단다. 코타라면 핀란드인들의 별장. 너무 비싸면 다른 곳에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가격을 물었다. 서프라이즈! 97유로란다. 조식은 다른 호텔에서 서비스한다며 바우처를 준다. 아마도 이 시기에는 방문객이 적으니 호텔들이 서로 상부상조해 한 호텔에서만 식사를 준비하는 듯하다.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위치한 코타 단지로 가는 길을 안내받고 우리의 오두막(103A)을 찾아 페달을 밟는다. 인근 숲속에는 멋들어진 통나무 오두막들이 일정 간격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스키 슬로프 아래로 동화에 나올 법한 코타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곳에 대규모 리조트 하나쯤은 지어놓았을 텐데, 아기자기한 통나무집이라니…. 우리 단지에는 약 스무 개의 통나무집이 모여 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우리 코타의 문을 여는 순간, 억 소리가 절로 나온다. 화려한 디자인 없이 담백한 통나무집에 벽난로, 개인용 사우나, 여섯 명이 잘 수 있는 거대한 2층 침대, 깔끔한 주방…. 금방이라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갈 듯 환상적이다. 아무래도 둘이 사용하기엔 너무 아쉽다. 꼭 가족들, 친구들과 다시 찾겠다고 다짐했다.
기분 좋게 땀을 흘리며 개인용 사우나를 즐기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사우나에 딸린 조그만 창 너머로 순록 가족이 풀을 뜯고 있다. 순록 가족은 사우나의 작은 창에 숨어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창 바로 앞까지 다가와 풀 뜯는 일에 매진한다. 행복하다.
Y의 그때 → 오페라하우스 감싼 퓌헤 협곡엔 경건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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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루오스토 앞, 풀을 뜯으러 온 순록가족. 라플란드에서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이웃사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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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C와 나는 퓌헤-언플러그드가 열리는 야외 공연장으로 향한다. 루오스토에서 퓌헤까지는 25㎞ 거리로, 시속 10㎞ 정도의 자전거 속도로는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기 전에 자전거를 묶어둔다. 이제 짧은 숲길이 이어진다. 늪지대를 지나자 V자로 된 거대한 협곡이 등장한다.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협곡 아래로 핀란드인들은 길을 만들어두었다. 회색빛의 웅장한 협곡과 어울리는 담백한 길이다. 멋스러운 길을 지나자 서서히 공연장이 등장한다.
극적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협곡 한가운데 움푹 파인 자그마한 우물이 있고 그 주위로 공연장의 무대가 은근하게 놓여 있다. 객석은 가파른 경사면에 촘촘하다. 협곡의 생김새에 따라 객석이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다. 깊은 협곡은 그 자체의 울림이 있는 공연장이다. 가파른 객석으로 오르니 공연장의 모습은 더욱더 극적이다. 목수 두 명이 그 자리에서 톱과 망치질을 하며 올여름 공연을 위해 객석을 보수하고 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손놀림.
사실 나는 이렇게 멋진 오페라하우스를 본 적이 없다. 아마도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8월에 이곳을 다시 찾지 않는다면 말이다. 거장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헬싱키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핀란디아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적인 감동을 이 공연장은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공연장이 주는 경건함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어떤 장르의 음악이 울려퍼지더라도 완벽할 것 같다. 다시 한번 핀란드에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또 생긴다. 루오스토와 퓌헤의 뮤직 페스티벌을 꼭 한번 보고 싶다. 아니, 이 동네 주민이 되어 1년에 한번씩 소중한 시간을 갖고 싶다. 목수 두 분과 인사를 나눈 뒤 무대 위에 앉아 바람을 쐰다. 잊지 못할 시간이 흐른다. <끝>
글·사진 윤나리/디자이너·조성형/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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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지 않는 밤엔 즐겨라
여름은 핀란드에서 축제의 계절이다. 루오스토-클래식(www.luostoclassic.fi), 퓌헤-언플러그드(www.pyha.fi·사진)가 대표적인 여름 음악 축제다. 올해 루오스토-클래식은 지난 8월10~14일 열렸는데 내년은 10주년을 기념해 8월9~12일 더욱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다. 퓌헤-언플러그드는 핀란드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연주하기로 유명한데 지난 8월4~7일 열렸다. 여름에 열리는 다양하고 이상한 축제들은 혹독한 겨울에 응축된 핀란드인들의 열정과 끼를 발산하는 무대이다. 에어 기타 월드 챔피언십,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남편 찾기 대회(와이프 업고 달리기 월드 챔피언십), 딸기 많이 따기, 진흙탕 축구, 개미 덮고 오래 버티기, 휴대전화 멀리 던지기, 금 찾기 대회 등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절로 나는 다양하고 기괴한 대회들이 개최된다. 대회명은 우스꽝스럽지만 참가자들의 태도는 매우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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