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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 ‘정도전 기념관’에 있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영정. 원명교체라는 국제정세의 격동기를 살았던 정도전은 고구려의 고토 요동을 수복해야 한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명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자신을 잡아 보내라고 하는 등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그는 요동 정벌을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했다. 정도전 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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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나라 못거슬러’ 위화도 회군
“조선·화녕 중 국호 낙점해달라”
이성계, 주원장에 바짝 엎드려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명의 공갈에 격분한 우왕과 최영은 요동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우왕은 평양으로 나아가 요동 정벌을 위한 본영을 설치하고 원정군의 지휘부를 편성했다.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도도통사, 이성계를 우도도통사로 삼아 대략 5만여명의 병력과 2만여필의 전마를 동원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입하기 직전, 휘하의 군사들을 되돌린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명분을 비롯한 이른바 4가지 불가론을 내세워 회군한 뒤 쿠데타를 감행한다. 위화도회군이 그것이었다. 이윽고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은 잘 알려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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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을 공격하기 직전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한 것, 왕조 개창 직후 국호를 정해 달라고 하는 등 명에 대해 지극히 공순한 자세를 취했던 것 등을 고려하면 이성계 일파를 사대주의자로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성계와 그의 가장 가까운 참모 정도전은 사대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왕조 개창 이후 그들이 보여준 일련의 지향을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명에 대해 공순하게 조공과 사대를 다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히 명과의 갈등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왕조 교체의 사실을 알리러 갔던 조반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하자 1392년 10월, 조선은 명에 다시 사은사를 파견했다. 사은사는 문하시랑찬성사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당시 정도전이 귀국한 이후부터 주원장은 정도전을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도전이 귀국 길에 산해위를 지나면서 했다는 발언이 주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산해위에서 “(일이) 잘 풀리면 좋지만 잘 풀리지 않으면 와서 한바탕 공격하겠다”고 운운했다는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주역이었던 정도전의 이 발언은 사실상 명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정도전은 언제부터 요동에 대한 야심을 품었던 것일까? 1398년 이른바 왕자의 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이후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정도전의 야심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요동을 ‘고구려의 고토’이자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강토로서 여기고 있었다. 정도전은 일찍이 저술한 <경제문감별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아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왕건이 평양에 자주 거둥하여 친히 북변을 순시하면서 동명왕의 고토를 회복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제시함으로써 500년에 이르는 고려의 국맥을 배양했다’고 찬양했다.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을 찬양했던 정도전의 야심은 그가 이성계에게 했다는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에게 과거 오랑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자가 되었던 역사적 사례를 설파하면서 요동 정벌을 권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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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의 목판. 1397년 그의 아들 정진이 2권으로 처음 간행했고, 1791년(정조 15년) 정조의 명에 따라 모두 14권 7책, 총 228판의 목판으로 만들어졌다. 문화재청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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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전 문제’로 명과 외교갈등
‘회군’ 9년만에 요동공격 준비 주원장은 1395년(태조 4) 10월, 신년 축하 사절 유구 등이 가져간 표전의 내용을 문제 삼아 유구 등을 남경에 억류했다. 주원장은 표전의 작성자로 정도전을 지목한 뒤 정도전을 보내야만 유구 등을 석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주원장은 이어 같은 해 11월에 남경에 도착했던 계품사 정총 일행이 소지했던 표전의 내용, 1397년 8월에 보낸 천추사의 표전 내용도 문제 삼았다. 명은 정도전 등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억류한 사신들의 처자까지 보내라고 강압했다. 급기야 조선이 표전 문제와 관련하여 보낸 정총, 김약항, 노인도 등을 처형하는 초강수를 뽑아 들었다. 표전 문제를 계기로 지속된 명의 강압적인 태도는 정도전 등의 요동 정벌 의지에 불을 붙였다. 1397년(태조 6) 8월 이후 정도전과 남은 등은 연일 이성계를 만나 요동 공격 계획을 밝히고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불과 9년 전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며 위화도회군을 단행했던 개국 주체들의 시선이 다시 요동으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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