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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에 그려진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일부. 조선후기 조-일 교섭의 창구였던 동래에서 동래부사가 일본 사절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습. 조선은 15세기 초, 왜구들을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담을 안게 되었다. 왕래하던 일본 사절들은 때때로 조선의 접대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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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⑧ 조선 초기의 한일관계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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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송환하면 선물 하사하자
일본 유력자 앞다퉈 왜구 금압 “왜인들이 우리 변경을 침탈했으니 그 죄를 다스려야 마땅한데, 전하께서 아량과 덕을 베풀어 왔습니다. 사신을 통하고 무역을 허락하니 마음으로 기뻐하고 지성으로 복종해 와서 예물 바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익을 탐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어 배에서 내리자마자 물건을 요구하고, 지나는 고을에서 표독한 짓을 자행하여 칼로 백성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약탈하니 부도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인이 왕래하며 죄를 범하면 대명률(大明律)로 다스리소서. 살인한 자는 법에 따라 처단하고, 칼로써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곤장 80대와 유배 2년에 처하고(…) 재물을 빼앗은 자는 곤장 1백대와 유배 3년에 처하소서.” 1414년(태종 14) 9월, 형조에서 올린 보고의 내용이다. 조선이 일본인들의 왜구 행위를 막으려 국교를 열고 무역을 허용했던 사실, 일본인들도 그에 호응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던 사실, 또 왕래하는 왜인들이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사실 등이 생생하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조선왕조 또한 개국 직후부터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심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승려 각추(覺鎚)를 무로마치(室町) 막부에 보내 왜구를 금압해달라고 요청했다.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왜구들에 대한 통제와 잡혀온 조선 포로들의 송환을 약속하고 승려 수윤(壽允)을 조선에 회답사로 파견한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또한 이렇게 왜구 문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또한 큐슈의 실력자인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과도 활발히 접촉했다. 이마가와 료순은 1394년 7월, 조선인 포로 659명을 돌려보내며 왜구를 금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료순은 1395년에도 포로 570여명을 송환했다. 조선은 감사 사절을 보내 그의 공로를 치하하고 토산물과 대장경 등을 선물로 주었다. 왜구 금지를 약속하고 포로들을 돌려보내자 조선 조정이 대장경을 비롯한 선물을 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다른 지역의 유력자들도 자극을 받게 된다. 큐슈는 물론 잇끼(一岐)와 하까다(博多) 방면의 유력자들도 왜구 금압을 내세워 조선과의 통교 교섭에 나서게 된다. 큐슈의 또 다른 유력자였던 오우찌(大內義弘)는 1395년 이후 조선에 사절을 잇따라 보내 토산물을 헌상하고 왜구를 금압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 조정이 반색하자 그 또한 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했다. 왜구 금압과 포로 송환을 내세워 대장경을 비롯한 조선의 하사품을 맞바꾸는 형태로 교섭이 진전되었던 것이다. 1404년(태종 4) 7월,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승려 주당(周棠)을 조선에 보내 빙문(聘問)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국서에서 스스로를 ‘일본 국왕’으로 칭했던 점이다. 과거 천황을 의식하여 고려나 조선에 보내는 국서를, 외교를 담당하는 승려의 명의로 작성해 보냈던 것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이다. 이것은 조선과 막부 사이에 정식으로 국교가 성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은 이후 막부 장군이 보낸 사신을 국왕사(國王使)로 대접했다. 16세기 중엽까지 모두 60여 차례 국왕사가 조선을 찾았고, 조선 또한 1473년까지 통신사(通信使)라는 명목으로 막부에 사절을 파견했다.
일대다 외교·귀순책 성공했으나
사절·향화인 늘자 접대·통제 부담
10곳의 사절만 받는 등 대책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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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海美邑城) 진남문(鎭南門)의 모습. 조선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국의 주요 연안 지역에 성을 쌓았다. 태종 연간에 축성된 해미읍성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소재.
문화재청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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