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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21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직계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극비리에 진행된 최종길 교수의 장례식 날 가족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영문을 모른 채 웃으며 뛰어다니는 딸 희정양, 아들 광준군, 최 교수의 막냇동생 종선씨, 최 교수의 부인 백경자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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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 ‘그 아버지의 그 아들’ 최광준 교수
“1973년 10월21일 장례식날은 무척 쌀쌀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관에 봉한 채로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치했다. 그때 나는 ‘아빠’ 하고 달려가서 그 관을 활짝 열어보고 싶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인을 밝혀내고 싶은 절실한 감정의 첫 표현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 최종길 교수를 떠나보낸 그때 10살 소년이었던 광준(48)은 평생토록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서’ 살아왔다. 장례식 직후 “형님이 쓰던 책 원고가 다 끝나 가는데, 조교분에게라도 완성시키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삼촌과 어머니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그는 “엄마! 그 책 쓰지 말라고 해! 내가 다음에 커서 꼭 쓸 테야!”라고 소리쳤다. 그로부터 20여년 뒤 그는 아버지가 박사학위를 받은 독일의 쾰른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아버지를 가르쳤던 케겔 교수의 지도 아래 같은 강의실과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아버지가 살았던 기숙사를 항상 자전거로 지나다녔으며, 아버지의 옛 친구들을 만났다. 지금은 경희대 법대에서 아버지처럼 민법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장례식날 어머니 백경자씨는 광준과 세살 아래 여동생 희정 남매를 꽉 껴안으면서 “이제 우리끼리 사는 거야” 하면서 흐느꼈다.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의 부인이자 의사인 백씨에게조차 주검을 보여주지 않았다. 검시 과정에 변호사나 의사의 입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주검은 절대로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 아래 봉인된 채 가족에게 인계됐고, 묘지까지 앞뒤로 정보부의 감시차량에 둘러싸여 갔다. 장례식에는 오직 직계 가족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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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17일 서울대 근대법학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고 최종길 박사 25주기 추모식’에서 아들 최광준(맨 왼쪽) 교수가 어머니 백경자씨와 가족들과 함께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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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며칠 전 만난 광준씨는 “팔순을 앞둔 어머니가 얼마 전 폐암 수술을 받으셨다. 어머니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기쁜 마음으로 언젠가 세상을 떠나셨으면 한다”며 또 눈물을 글썽였다. 예전에도 최 교수 얘기를 할 때면 그도 울고 나도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어머니를 마음의 평화 속에 살다가 기쁘게 떠나게 할 수는 진정 없는 것인가.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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