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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09 20:12 수정 : 2012.01.09 20:59

1982년 8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이돈명 변호사의 회갑 기념 모임에 당대 인권변호사들과 문화예술인들이 두루 함께했다. 앞줄 왼쪽부터 이경일(해직언론인)·유인호(해직교수)·한승헌(변호사)·조태일(시인)·이호철(소설가)·변형윤(해직교수)·이돈명·김정남(필자)·홍성우(변호사)·김진균(해직교수). 뒷줄 왼쪽부터 송건호(해직언론인)·이경의(숙대 교수)·박현채(해직교수)·(한사람 건너)정태기(해직언론인)씨. <인권변론 한 시대> 중에서

그때 그 사람 수난시대에 아름다웠던 사람 이돈명

내가 범하 이돈명 변호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봄이었다. 민청학련 사건 등 긴급조치 위반 정치범 200여명이 풀려난 ‘2·15 석방조치’의 유화국면이 끝나고, 유신권력이 ‘긴급조치 9호’의 날을 세우던 시점이었다.

8명을 전격 사형시킨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을 폭로해 20여일 만에 ‘반공법 위반’으로 재수감된 김지하 사건의 선임을 자청하고 나선 사람이 이 변호사였다. 그때부터 인권변호사들도 줄줄이 투옥되던 수난의 시대에 그는 힘들고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김지하 변론 때 그는 당시 박정희 정권, 특히 중앙정보부가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하였던 인혁당 관계 발언을 중점적으로 맡았다. 79년의 오원춘 사건 때는 위증을 뒤집는 증거를 깜짝 제시해 검찰의 음모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것은 변론이라기보다는 한편의 멋진 법정 연기였다. 10·26 사태 때, 과연 우리가 김재규 사건을 맡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을 때, 그래도 맡아야 한다는 쪽으로 이끌어 간 것도 그였다. 김재규 사건의 변호인 상고 이유서는 굳이 당신이 쓰셨는데, 거기에는 김재규의 의기뿐만이 아니라 이돈명 변호사의 의기도 함께 담겨 있다. 82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서는 그때까지 금기였던 반미문제에 대해 말문을 텄다.

이 변호사가 이처럼 인권변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가 속했던 제일합동법률사무소의 밑받침이 컸다. 제일합동은 법조계의 인망이 높았던 김제형 변호사를 대표로, 이 변호사와 그의 가장 친한 동료인 유현석 변호사 등 4명으로 구성되었다. 83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단식 때 ‘국민에게 드리는 글’, ‘김대중·김영삼의 8·15 공동성명’ 같은 민주화 문건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제일합동 사무실에서 제작되었다.

74년 크리스마스 때 가톨릭 영세를 받은 이 변호사는 해마다 여름 세례명인 ‘토마스 모어’의 영명축일 때면, 가까운 친지들을 집에 불러 잔치를 벌이곤 했다. 75년 여름 초대받아 간 그 자리에서 나는 고교(대전고) 동기동창 2명을 만났다. 이 변호사의 맏아들 이영일과, 그의 사위 양원영(현 휘문고 교장)이었으니 묘한 인연이었다.

범하 선생을 얘기할 때 ‘거시기 산우회’를 빼놓을 수 없다. 애초 산우회는 친목 모임이었다. 제일합동에 드나들던 이중재 의원이 소개한 친구 정익용 회장 일행과 자연스럽게 등산을 시작했는데, 이들을 ‘구파’라 부른다. 정기용·배상희·구연우·김영덕·김민영 등 제씨가 그들이다. 그러다 70년대 후반부터 시국 관련 인사들이 하나둘 합류하니 ‘신파’라 하겠다. 변형윤·리영희·송건호·이호철·박현채·전무배·박중기·백낙청·김달수·이경의·김병오·조태일·박석무·정해렴·권광식·정수일·이정룡·고광헌·이도윤·여치헌·도재영 등이다. 몇몇 분은 벌써 고인이 되었다.

옛날 산에서 취사를 할 수 있었을 때는 팔도의 별미·특미가 다 모여 반찬이 30~40가지나 되었다. 반주는 야호주라고 해서 큰 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 돌아가며 먹고 싶은 만큼 마셨는데 흥에 겨워 노래판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선생의 애창곡(십팔번)은 ‘물어 물어 찾아왔네/ 그 님이 계시는 곳/ 차가운 밤바람만 몰아치는데/ 그 님은 간 곳이 없네/ 저 달보고 물어본다/ 님 계신 곳을/울며불며 찾아가도/ 그 님은 간곳이 없네’ 하는 가사로 된 노래인데, 나는 최근에야 그것이 나훈아의 ‘님 그리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끔은 몸이 날아갈 듯 낮추었다가는 높이면서 노래를 불렀다.


범하는 기지와 해학이 대단한 분이었다. “아첨은 남이 보기엔 안 좋지만, 받아보면 좋은 것이네.” “나는 술만 마시면 취하는데, 많이 마시면 더 많이 취한다네.” 같은 해학이라도 그의 입에서 나오면 ‘저것이 바로 해학’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선생과 맞담배를 피웠고, 점심때도 소주 한 병을 두 개의 맥주잔에 나누어 반주를 하곤 했다. 연세에 비해 주량이 센 그는 나와 자주 술판을 벌였는데, 밖에서 마시고, 헤어지려다 댁에 가서 또 마시고, 낮에도 마시고, 밤에도 마셨다. 집에는 사모님이 담가 놓은 매실주와 송실주가 얼마든지 있었다.

사실 나는 범하 선생에게 큰 죄를 지었다. 86년 이른바 5·3 인천사태 때 도피중이던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을 고영구 변호사 댁에 은신시킨 뒤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 변호사 댁에 숨겨준 것으로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선뜻 그러마고 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이부영이 나를 만났다가 붙잡힌 뒤, 권근술(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을 비롯해서 도피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하나둘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나 역시 간발의 차로 체포를 피한 뒤 수배전단에 올랐다. 그런 며칠 뒤 아침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이 변호사를 연행해 갔다. ‘설마 65살 고령인 선생을 잡아넣으랴’ 했던 우리의 생각은 너무도 순진했던 것이다.

그 다음날이었던가, 나는 고영구·황인철·홍성우·조준희 변호사에게 연락해 평창동 어디선가 만났다. “이제 와 진실을 밝혀도 이 변호사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될 것이다, 이 변호사에게는 실로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이대로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속수무책이었고, 이 변호사는 그 이듬해 봄 풀려나올 때까지 감옥에 갇혀야 했다.

범하 선생은 이 옥고로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은 더 높아졌는지 모르나 옥중에서 병을 얻었다. 연세 탓도 있겠지만 그 뒤 잦은 병치레를 하는 것을 보면서 죄송스러움과 조마조마함을 어쩔 수 없었다. 그 가족들은 내가 얼마나 밉고 또 원망스러웠을 것인가. 나는 지난해 선생을 떠나보낼 때까지 그 가족들에게 진지하게 용서를 빌지 못했다. 선생은 내게 우촌(友村)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민중과 더불어, 민중의 벗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 내게 과분할 뿐이나, 묵혀두기엔 너무 아까워 모르는 척 그냥 쓰고 있다. 선생은 내게 영원한 사표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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