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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6.24 20:47 수정 : 2011.10.26 11:20

배 안에서 만난 후버 선장. 선장은 고독한 직업이다. 모든 판단은 혼자서 내려야 하며 궁극의 책임은 그의 어깨 위에 있다.

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 ②선장이라는 캐릭터
“선장도 포기해버린 태풍 속의 배
당시 화물사관이던 후버가 구해”
페가서스에 비해 꼬마같은 예인선
실제 힘은 엔진출력 3천마력 ‘거인’

배에 타자마자 서둘러 만나본 크로아티아 사람 다미르 후버 선장은 키가 190㎝는 되어 보였다. 카리스마 풍기는 수염에, 눈꼬리는 치켜 올라가 있는데다 목소리는 우렁우렁한 것이 정말로 큰 배의 선장 이미지에 딱 맞는 분이었다.

이제 선장님을 만났겠다, 대망의 항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하이 양산항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출항이 연기됐다. 모든 컨테이너를 다 싣고 갠트리 크레인(다리 모양 받침이 달린 항만용 대형 기중기)의 붐(팔 부분)은 올라갔고, 우리 배를 항구 밖으로 안내해 줄 파일럿(도선사)까지 올라타서 선장과 인사까지 했는데 항구가 폐쇄되었다. 처음에는 ‘항구가 폐쇄되었다’(port is closed)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안개가 끼어 공항의 이착륙이 금지되는 것은 보았지만 안개 때문에 항구가 폐쇄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안개(fog)가 아니라 안개비(mist)였다. 안개는 기온이 올라가고 바람이 불면 사라지지만 지금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안개비는 온 대기를 가득 메운 채 그칠 줄 모르며 터미널의 배들과 컨테이너들, 갠트리 크레인들을 사르륵사르륵 적시고 있었다. 상하이의 바닷물은 황허(황하)에서 내려온 흙탕물로 완전히 누런 뻘이고, 하늘은 안개비로 꽉 막혀 있었다. 먼 항해의 출발치고는 그리 상쾌한 편이 아니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선장과 노닥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사실 배를 타기 전부터 가장 궁금한 것 중 하나가 선장은 어떤 캐릭터를 가진 사람일까 하는 것이다. 흔히 선장이라는 사람은 독선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선장이란 흔히 배라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독선적이기만 해서는 선장이 될 수 없다. 카리스마에다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후버 선장에게서 배운 것은, 카리스마는 침착함에서 온다는 것이다.

선장은 갑자기 어떤 사태가 닥쳤을 때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대처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30년 선장 생활을 버텨 온 것은 무조건 억누르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냉정함과 분별력에 있다는 말이었다. 바다라는 무시무시한 조건에 시달리며, 그는 마음을 다스려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배웠다고 했다.

사우샘프턴에 입항할 때 파일럿과 상의하는 후버 선장.
후버 선장이 1986년 10월6일이라고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날, 얘기만 들어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선장은 2만t 정도의 잡화선에서 화물 담당 사관으로 일했는데 그의 배는 일본 근해를 항해하던 중 태풍의 한가운데 들어서게 되었다. 요코하마로 가는 길이었으나 사정없는 태풍에 떠밀려, 엔진은 돌아가고 있음에도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다 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극심하게 요동치는 배에서 선원들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격랑에 떠밀린 배는 해안가 바위 앞 100m까지 근접해갔다. 그런 광경을 본 그 배의 선장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위스키 한 병을 그 자리에서 들이켜고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버렸다. 사무장은 정신이 나가 의자에 뻗어 있었고 선원들은 한데 모여 가족들의 사진을 보며 울부짖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나서서 사태를 수습한 것은 지금의 후버 선장이었다. 그는 선장이 인사불성에 빠졌음을 보고는 자신이 선장의 직무를 떠맡았다. 후버 선장은 갑판장에게 배에서 물이 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고, 아무 데도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다면 배는 상태가 괜찮은 것이다. 그리고 기관장에게 엔진의 상태가 어떻냐고 하니까 70%의 출력을 내고 있다고 한다. 엔진은 정상이었다. 배가 파도에 휘말렸을 때 엔진이 꺼지면 휩쓸려 전복될 수 있지만 엔진이 돌아가고 있다면 자기 방향을 찾아 안정성을 되찾을 수 있다. 기관장에게 엔진 출력을 최고로 내라고 지시했고, 배는 그제야 조금씩 느리게나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시속 1노트나마 속도를 내면서 사태는 수습되는 쪽으로 접어들었다. 위급한 사태가 났을 때 사태의 핵심을 딱 움켜잡고 이것부터 해결해야겠다는 침착한 태도가 후버 자신과 배와 선원들을 구한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과 지중해를 두고 접한 유럽의 끝 지브롤터 부근의 전자 해도. 후버 선장의 말을 들어보면 지브롤터 해협은 폭이 좁은데다가 오가는 배들이 많고 조류가 거세서 배를 조종하기가 아주 힘들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듣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4시다. 양산항을 뒤덮던 안개가 걷혀서 항구는 다시 열리고 출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가서스는 바로 나갈 수가 없었다. 페가서스의 흘수(배의 밑바닥에서 수면까지의 깊이)가 15m로 깊기 때문에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썰물이 빠지고 수심이 얕은 상태에서는 배의 바닥이 바다 밑바닥에 닿아 좌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페가서스는 수심이 만조에 이르는 밤 9시나 돼서야 항구를 떠날 수 있었다.


페가서스에게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출항은 내게 흥분되는 일이다. 출항은 선장-도선사-예인선-2등 항해사 사이에 무전기를 들고 이루어지는 복잡한 오케스트레이션이다. 물론 총지휘자는 선장이다. 배에 올라탄 도선사는 선장과 인사하고 배의 길이, 총톤수, 흘수, 선적량이 적힌 차트를 넘겨받고는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한다. 예인선에서 던져준 줄을 배에 묶으면 2등 항해사는 “턱 이즈 패스트!(Tug is fast: 줄 묶었음)”라고 선장에게 알려준다. 선장은 예인선에 배를 밖으로 끌어내라고 신호한다. 페가서스에 비하면 예인선은 꼬마 같아 보이지만 엔진 출력 3천마력의 거인이다. 그 정도면 승객 350명을 태우고 남해안을 운항하는 쾌속선과 비슷한 힘이다.

페가서스가 어느 정도 바다 바깥으로 나가자 이윽고 예인선의 줄이 풀렸다. 13만t 화물을 실은 페가서스는 아주 천천히 밤바다 속으로 밀려나갔다. 이제 출항이다!

요즘 컨테이너선들은 연료를 절감하기 위해 경제속도인 16노트 정도로 운항하는 편이다. 그러나 아시아·유럽 대륙이 서로 필요로 하는 온갖 물류를 책임지고 있는 페가서스에는 시간을 지체할 틈이 없다. 페가서스는 양산항을 나서자마자 24노트의 속도로 이틀 뒤 도착할 샤먼항까지 곧바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파고가 4m 정도 되는 동중국해에는 해무가 짙게 끼어서 먼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레이더와 지피에스(GPS) 등 첨단의 눈을 갖춘 페가서스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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