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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7.08 20:31 수정 : 2011.10.26 11:26

크고 작은 배들이 출근시간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차량들처럼 뒤엉킨 모습은 전세계에서 홍콩 항에서만 볼 수 있는 희한한 광경이다.

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 4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항구 홍콩 항
홍콩항엔 배들이 아비규환을 이룬다
경적은 자동차만 울리는 것이 아니다

지난 회에 배를 타고 누리는 안복(眼福), 즉 눈의 복을 얘기했다.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배에서 보는 항구의 산업적 경관은 최고의 안복을 제공한다. 몇 군데의 항구를 다녀보면 항구의 크기, 선석(배가 머무는 항구의 구역)의 개수, 갠트리 크레인(항구의 선적용 기중기) 같은 장비의 종류와 수량 등으로 전세계 물류의 중심이 어딘지 파악할 수 있다. 그 중심은 단연 중국의 항구들이다. 이번 항해에서 여러 항구들을 다녀보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홍콩 항의 콰이충 터미널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구였다. 반면, 이 여행의 종착지인 영국의 사우샘프턴 항은 1912년 타이태닉이 출항했다는 역사성이 있는 곳이긴 하지만 낡은 크레인만 몇 대 있는 초라한 항구였다. 다롄, 양산, 샤먼, 옌톈 등 새로 생긴 중국의 항구들이 직선으로 된 선석을 갖고 있고, 입출항하는 배들의 동선도 복잡하게 얽히지 않게 돼 있다면, 홍콩의 선석은 복잡한 모양에, 수많은 종류의 배들이 마구 뒤얽힌다. 홍콩 항에서는 배들이 출근시간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차량들처럼 서로 뒤엉켜서 아비규환을 이룬다.

경적은 자동차만 울리는 것이 아니다. 수십 만 톤의 배가 접안을 하러 접근하는데 몇십 톤도 안 되는 잡화선이 바로 앞을 지나가면 다급한 나머지 경적을 울린다. 1만3000TEU의 엠에스시 사보나(MSC Savona)호는 들어오고, 5000TEU의 시엠에이 시지엠 쇼팽(CMA CGM Chopin)호는 나가려 하고 있고, 그 틈바구니로 컨테이너를 열개도 안 실은 작은 연안 피더선(중소형 컨테이너 선박)들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다. 그리고 부두의 트럭들은 어떤 항구보다도 촘촘히 늘어서서 컨테이너를 싣거나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벙커시유 아니면 디젤유 등 오염물질을 많이 배출하는 연료들을 주로 태우는 배와 갠트리 크레인, 트럭에서 나오는 매연들, 또 그 기계들의 소음이 합쳐져서, 홍콩 항은 시각과 청각과 후각의 엄청난 오케스트레이션을 이룬다. ‘풍경’이란 말을 들었을 때 시각적인 것만 떠올린다면 당신은 틀렸다. 홍콩 항의 풍경은 시각, 청각, 후각의 세 가지 층위에 존재한다. 그중에 어느 한 차원을 빼도 홍콩이 아니다.

홍콩 항은 예외적으로 일반인들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산업항구다. 첵랍콕 공항에서 시내로 가려면 2009년 개장한 스톤커터스 다리를 건너는데, 그 다리 위에서 이런 모습들이 다 보인다. 그러나 빨리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전세계 어느 항구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홍콩 항의 요소들을 구분할 수 있는 일반인은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일반인들은 산업경관에서 소외돼 있다. 그들은 평소에 산업경관을 볼 기회도 없고, 산업경관을 구분해낼 수 있는 감식안도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산업경관은 의미의 영역으로 비치지 않는다. 산업경관을 떠받치고 있는 에너지의 메커니즘과 그 요소들은 눈으로 쉽게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비평가는 오늘날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감춰져 있는 이 거대한 경관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찰한다. 일반인의 눈에 산업경관이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뒤엉킨 실타래로만 보인다면, 비평가에게 산업경관은 사람의 몸처럼 근육(크레인)과 혈관(트럭과 컨테이너의 이동), 신경(정보 네트워크) 등이 구분돼 보이며 그 각각의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다. 그것은 나름의 생명을 가진 공간이다.

연안 피더선 컨테이너 1~10개 실으려
대형선박 오가는 모습 ‘홍콩만의 풍경’

항구 앞바다에 뜬 큰 배에서 컨테이너를 받아 육지로 날라주는 작은 지겟배(피더선). 홍콩 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흔히 풍경이라고 하면 나무가 있고 앞에는 아름다운 강이 흐르며, 배경에는 산이 있고 산중턱에는 구름이 걸려 있는 광경을 떠올린다. 홍콩 항의 풍경은 나무 대신 대형 선박들이 잔뜩 있고 아름다운 강 대신 드넓은 바다가 있다. 그 배경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잔뜩 서 있으며, 그 중턱에는 구름 대신 갠트리 크레인들이 걸려 있다. 그것은 온통 강철이 지배하는 풍경이다. 실제로 홍콩 항을 찍은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다가 풍경을 이루는 요소가 온통 강철로만 된 것을 보고 나 자신 놀란 적이 있다. 나무, 산, 강, 집이 아니라 오로지 강철로만 된 풍경. 그런 극도의 삭막함이 역설적으로 일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숭고미를 만들어낸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산이나 강과는 달리 이 풍경은 누구도 감상해 주지 않는다. 지금 드넓은 홍콩 항에서 이 경관을 감상하며 그 의미가 무엇일까 음미하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삭막하지만 가장 유용하고, 가장 무식한 강철로 돼 있지만 가장 정교한 정보망의 통제를 받는, 극도로 아이러니한 21세기의 경관이다.

다른 항구에서는 볼 수 없는데 홍콩 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하이테크와 로테크의 결합이다. 일반적인 컨테이너 터미널의 구조는 ‘컨테이너선-갠트리 크레인-트럭’으로 된 단순화된 흐름이다. 1956년 미국에서 시작된 화물운송의 컨테이너화가 많은 난관을 헤치고 이런 간결한 구조를 만들어 냈다. ‘컨테이너선-갠트리 크레인-트럭’은 더욱 확장되어, 오늘날에는 ‘인터모들’(intermodal:복합운송)이라는 방식을 통해 ‘화물열차-트럭-선박’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가 전세계에서 쓰이고 있다. 이런 흐름은 무엇보다도 속도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홍콩 항에는 한 가지 더 추가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다에서 컨테이너들을 받아서 육지로 날라주는 작은 배들이다. 작은 선사의 100TEU 미만 컨테이너선인 이 배들은 컨테이너를 많아야 열 개, 적으면 한두 개 싣기도 하는 규모이다. 이런 작은 배들이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큰 컨테이너선들이 부두에 정박할 때 내야 하는 온갖 비용을 물지 않고 컨테이너들을 지상에 하역해주기 때문이다. 큰 배들은 부두로 들어오지 않고 홍콩 앞바다에 떠서 작은 배들에 컨테이너를 옮겨준다. 그래서 홍콩 앞바다는 아기새가 어미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듯이 약간 큰 배에서 컨테이너를 받아 싣는 정말 작은 배들의 올망졸망한 풍경이 이리저리 뒤얽혀 있다. 전속전진(full speed ahead)하다가 급후속으로 엔진의 회전을 역전시켜도 서는 데 16분, 거리로는 4킬로미터쯤 미끄러져 가야 하는 1만3000TEU급 배들은 작은 배들이 그 앞으로 마구 왔다 갔다 할 때 당혹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트럭이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작은 승용차가 끼어 들어 속도를 줄일 때 트럭 운전사가 당혹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여러 가지 모습들로 말미암아 홍콩 항의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미지가 액자에 들어 있듯이 풍경도 액자에 들어 있는데 항구에서 보는 홍콩의 경관에는 그런 액자가 없다. 바다에서 갑자기 홍콩 항이다. 액자는 경관을 만나기 전에 갖춰야 할 사전지식이기도 하고 마음의 준비이기도 하며, 입장료를 내듯이 실제로 거쳐야 할 단계들이기도 하고 치러야 할 의식이기도 하다. 반면, 화물선을 타고 콰이충 터미널로 접근해서 보는 홍콩 항의 경관에는 액자가 없다. 기껏 보는 이들의 준비라고 해봐야 항해 중 해도를 보면서 홍콩 항까지 몇 마일 남았고, 어디서 변침(배의 항로를 수정하는 것)해야 하고, 도착 예정시간은 몇 시고, 항구로 배를 인도하는 도선사는 몇 시에 배의 좌현(뱃머리 방향 왼쪽의 뱃전)으로 올라타고 하는 등의 기술적인 준비들뿐이다. 그것은 액자에 포함되는 상징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전적으로 ‘드라이한’ 절차들이다. 그래서 항구의 모든 사물들은 갑자기 달려든다. 홍콩 컨테이너 터미널이라는 초대형의 초복잡 기계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액자가 없이 홍콩 항을 맞이한다는 것은 루브르박물관에서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둘러싼 액자를 벗겨내고 캔버스 자체만을 보는 듯한 희귀한 경험이었다. 나는 디지털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로 홍콩 항의 액자 없는 기계들을 미친 듯이 찍어댔다. 산업경관의 안복으로 배가 부른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남중국해에 들어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기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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