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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7.15 20:18 수정 : 2011.10.26 11:31

밤의 컨테이너 터미널은 적막함 사이로 울려퍼지는 기계들의 소음으로 말미암아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컨테이너를 내려놓는 ‘우당탕!’ 하는 소리도 낮에 듣는 것보다 더 가슴속까지 울려온다.

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 ⑤ 바다가 다르면 소리도 다르다

‘푸캉푸캉’ ‘빠지직’ 오케스트라처럼
엔진과 펌프들의 화음은 매우 복잡
갠트리 크레인 1분에 한번 소음
컨테이너 터미널 나름의 리듬도

믈라카(말라카) 해협을 빠져나오면서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배 모양에 대해 선장과 얘기하고 있는데 마침 눈앞을 엠에스시(MSC)의 1만3000TEU급 극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지나간다. 이런 배는 조타실에서 배의 앞 끝단까지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으므로 덱하우스(갑판실: 슈퍼스트럭처라고도 한다)는 배의 중간에 있고 엔진은 뒤쪽에 놓여 있다. 그래서 선장에게 그 배를 가리키며 덱하우스가 엔진룸 위에 있지 않으니 소음과 진동이 전해지지 않아서 거주성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선장은 이까짓 진동은 진동도 아니라면서, 자신이 배를 타던 초기인 1980년대에는 하도 진동이 심해서 온몸이 덜덜 떨리고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는 엔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엔진의 상태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며 의사가 청진기로 환자의 몸 상태를 듣는 것과 비교했다. 그에게 배의 엔진 소리는 생명의 소리였던 것이다.

선장 말마따나, 기계의 풍경에는 반드시 소리가 들어간다. 모든 기계는 크든 작든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이번 항해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탄 이유는 기계의 작동을 동영상으로 찍어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소리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배에서는 항상 어디선가 엔진 소리가 들린다. 배에는 출력 10만마력의 주엔진 외에도 출력 3천마력의 발전용 디젤엔진이 다섯 대, 각종 펌프들이 있어서 이 기계들이 내는 화음은 상당히 복잡하다. 항해 중에는 주엔진의 소리가 둔중하고 무거운 저음으로 들려온다. 엔진실은 배의 아래쪽에 있으므로 그 진동과 소리는 여러 겹의 쇠로 된 구조물이라는 필터를 통과하여 많이 걸러진 채 전달된다. 선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소리라기보다는 어떤 무거운 에너지만이 전달된다. 거인의 심장이 뛰듯 쿵쿵하고 울려오는 에너지이다. 정박 중에는 이 거인이 잠자고 있으므로 무거운 진동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발전용 디젤엔진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인데 대개 정박 중에는 한 개만 켜 놓는다. 3천마력이라고는 하지만 10만마력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기 때문에 발전용 엔진의 소리는 선실까지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 그냥 뭔가가 살살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남중국해를 시속 24노트 전속으로 항해하는 지금, 배는 온갖 소리들의 심포니(교향악)를 들려주고 있다. 푸캉푸캉 하고 심장이 뛰듯 일정한 주기로 들려오는 메인엔진 소리 너머로 삐드득, 뿌드득, 빠지직, 뻐겅 하는 온갖 구조물들이 내는 다양한 소리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여러 악기들이 다른 소리를 내듯 협연을 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 누구도 작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소리로 조화를 이룬 심포니가 아니라 헤테로포니(이질적인 소리들의 총합)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배에서 겪는 소리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다에 따라 배에서 다른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즉 바다가 움직이는 양상에 따라 배의 부위 중 소리를 내는 부분이 다른 것이다. 날마다 바다의 파고가 다르고, 파도가 치는 방향이 다르고 어떤 바다에는 파도보다는 놀이 크고 어떤 바다에는 파도만 세기 때문에 그에 따라 소리를 내는 배의 부위가 다르다. 배라는 것이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도, 여러 구조물들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다양한 소리들이 난다.

배가 천천히 옆으로 롤링하면 선실을 이루고 있는 여러 재료들이 조금씩 삐걱거리며 다양한 소리를 낸다. 왼쪽으로 끼기기기긱, 오른쪽으로 끼기기기긱 하는 식이다. 양쪽으로 공평하다. 그러다가 앞뒤로 피칭(배나 비행기가 앞뒤로 흔들리는 현상)을 하면 또 다른 소리가 난다. 악기의 현이 굵기와 길이에 따라 일정한 소리를 내듯이, 배를 이루는 각 부분들이 일정한 주기에 맞춰 일정한 소리를 낸다. 상하이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그랬다. 그러다가 지중해에 들어서자 대륙이 바뀌어서 그런지 바다가 롤링하는 방향이 살짝 바뀌었고, 이제껏 전혀 들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소리다. 그것은 쁑쁑 하는 약간 우스운 소리다. 엘리베이터의 칼럼(기둥)이 그 주위의 벽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내는 소리다. 나는 항해를 눈으로 느낄 뿐 아니라 소리로도 느낀다.

말 10만 마리의 힘이 오롯이 다 프로펠러 샤프트에 걸려 있다. 주엔진실에 들어갈 때는 헤드셋을 착용하여 귀가 손상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배 안에서 듣는 소리가 항해의 소리 전부는 아니다. 컨테이너 터미널은 배 안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소리들이 더 복잡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이 존재하면 소리를 내는데, 컨테이너 터미널에는 무겁고 심각하고 튼튼하고 복잡한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소리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배에서 트럭으로 컨테이너를 나르는 항구의 갠트리 크레인이다. 그리고 야적장에서 트럭으로 컨테이너를 나르는 설비인 트랜스포터가 있다. 그리고 컨테이너들을 옮기는 수많은 트럭들이 있다. 그리고 배의 엔진소리가 있다. 이런 소리는 일부러 내려고 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기계 작동의 부산물이므로 무의지적이다. 반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주의를 끌든가, 위협하든가 하기 위해 의지적으로 내는 소리들이 있다. 사람이 “비켜요”라고 말하든가 “여기 좀 봐요”라고 말하는 소리 같은 것이다. 갠트리 크레인이 움직일 때 내는 삑삑 하는 경고음, 트럭의 경적 소리, 배의 기적 소리가 그것이다.

이 모든 소리들이 다 합쳐진 소리는 대단히 불규칙하고 아무 리듬도, 박자도, 음정도 없다. 전체적으로 들으면 거대한 소음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소음의 덩어리에 리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갠트리 크레인은 평균적으로 1분에 한 대꼴로 배에서 트럭으로, 그리고 트럭에서 배로 컨테이너를 옮겨 놓는데, 그게 나름의 리듬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드문드문 배에서 들어올린 30톤짜리 해치 커버(컨테이너를 들어 올리고 남은 빈 공간에 덮어두는 거대한 강철판)를 내려놓는 소리가 난다. 해치 커버는 무게는 컨테이너와 비슷한 30톤이지만 넓적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체 전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아주 큰 소리를 낸다. 이때 나는 쿠당탕! 하는 거대한 소리는 공포감마저 주는, 기계의 숭고미 그 자체이다. 이 소음들은 매우 규모가 크고 복잡하지만 누구에게도 어필하지 않고 혼자서 나는 쓸쓸한 소리다. 수많은 기계들이 합창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도, 거기에 대해 평가해 주는 사람도, 너무 시끄러우니 뭔가 조처를 취해야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것이 산업 경관의 특성이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비평가 외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기계의 소리는 기껏해야 제거해야만 하는 천덕꾸러기 같은 대접을 받고 있을 뿐이다.

기계라는 것이 간단히 무시하거나 기능의 영역으로만 밀쳐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계의 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리를 내니까 말이다. 기계의 소리를 덜 시끄럽게, 혹은 좀더 듣기 좋은 소리로 바꾸려는 시도는 귀와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혹은 소리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계속 있어 왔다. 그러나 배라는 곳은 걸러지지 않은 소리의 존재감이 사람을 압도하는 곳이다. 소리라는 면에서도 배의 세계는 육지에 있는 사물의 세계와 다르다. 나는 그 소리들을 들으며 인도양의 안다만 해로 접어든다. 거기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이영준 기계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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