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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7.22 20:20 수정 : 2011.10.26 11:45

말레이시아의 전통적인 화물선 뒤로 4200TEU의 컨테이너선 짐 리보르노가 예인선에 끌려 포트 켈랑에 입항하고 있다. 뒤는 끝없는 밀림이 펼쳐진 풀라우 켈랑섬이다.

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⑥ 원시와 첨단이 교차하는 말라카해협
온도 제일 높은편인 홍해선기계들도 적응 힘들어 ‘골골’
포트켈랑 육지로 나간 선원은단 한번에 치료 끝내는 치과로

옌톈을 떠난 페가서스는 이틀을 항해하여 싱가포르 해협을 거쳐 말라카해협으로 들어간 뒤 말레이시아의 항구 포트 켈랑(포트 클랑이라고도 쓴다)에 닿는다. 페가서스의 항로 중 최남단인 싱가포르의 위치는 북위 1도17분, 동경 103도50분, 거의 적도 부근이다. 날짜는 2월1일. 건기와 우기의 차이를 빼고는 1년 내내 날씨가 거의 똑같은 이곳에서 2월이라고 해서 날씨가 특별한 것은 없다. 항해에서의 날씨는 언제냐도 중요하지만 어느 곳이냐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진다. 상하이에 오기 전에 페가서스는 중국의 다롄에 기항했는데 그곳의 날씨는 영하 10도에 눈이 많이 왔다고 한다. 그곳으로부터 10일이 지난 지금, 기온은 31도에 습도는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런 습기 찬 기후는 인도양 내내 우리를 따라오다가 수에즈 운하에 들어서서야 떠날 것이다. 그리고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을 따라 북상함에 따라 페가서스는 다시 겨울로 들어설 것이다.

항해는 지역과 기후의 차이를 동시에 견뎌야 하는 여행이다. 기온이 변하면 누가 제일 영향을 받고 고통을 느낄까? 사람이야 지역과 계절에 맞춰 날씨를 예측할 수 있고 몸이 그럭저럭 적응하지만, 기계는 날씨의 변화를 예측해서 적응하는 능력이 없다. 기온이 변하면 제일 고생하는 것이 엔진이다. 엔진은 바닷물을 끌어들여 냉각하는데, 기온이 변하면 바닷물의 온도도 변한다. 해수온도가 낮으면 괜찮은데, 더운 지역으로 들어가서 해수온도가 올라가면 엔진의 열을 식히기 힘들어진다. 전세계에서 해수온도가 제일 높은 축에 속하는 홍해는 서쪽에 수단과 이집트, 동쪽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는데, 양쪽 다 사막이라서 겨울에도 기온이 높고, 따라서 해수온도도 높다. 해수온도가 37도까지 올라가는 홍해에서는 엔진도 더위를 먹는다. 그러면 해수를 끌어들여 바로 엔진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냉각한 다음 보내줘야 한다. 사람도, 기계도 적정한 온도를 맞춰줘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결국 기계는 인간과 세계의 환경 사이에 끼어서 둘을 매개하는 ‘인터페이스’이므로, 양쪽의 성질이 극단적으로 변하면 버티기 힘들어진다.

말레이시아에서 제일 큰 항구인 포트 켈랑은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3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포트 켈랑 맞은편에는 풀라우 켈랑이라는 섬이 있다. 완전히 평평한 그 섬은 아주 낮은 땅이 한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전부 빽빽한 밀림이 들어차 있다. 열대의 구렁이도 표범도 독충도 있을 것 같은 밀림이다. 좁은 수로의 한편에는 첨단의 항구시설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원시의 밀림이 있다. 이게 바로 말라카다. 말라카는 시간과 공간의 축이 직교하는 그 중간에 놓여 있다. 공간적으로 보면 서쪽에 거의 문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광대한 밀림이, 동쪽으로는 한때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던 페트로나스 타워가 있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있다. 시간적으로 보면 포트 켈랑은 한때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던 말라카와, 이제는 동남아시아의 한 도시인 말라카 사이에 놓여 있다.

포트 켈랑에 컨테이너선과 벌크선들이 정박해 있다.
이 말라카가 바로 16세기에 향신료를 유럽으로 수출하고 유럽에서는 직물들을 수입하며 아시아 무역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주경철 교수의 <대항해시대>를 펼쳐 들고 읽는다. 마침 바로 그 말라카 얘기가 나온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6세기만 해도 유럽, 즉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이 확실하게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고 그 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세력은 중국과 인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시아에 진출하여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상선들은 지역 전체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몇몇 거점들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영향력을 넓혀가려 애쓰다가 점차로 쇠퇴했다는 것이다. 말라카가 바로 그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 말라카는 지금은 그저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밀림일 뿐이다. 오늘날 말레이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많이 나와서 주변 바다에는 컨테이너선보다 유조선과 엘엔지(LNG)선이 더 많이 보이고, 항구시설도 점차 확장해 가고 있기는 하지만 한때 여기가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끝없이 밀림만 있는데….

컨테이너 야적장 너머로 도시만 끝없이 펼쳐진 다른 항구들과 달리, 포트 켈랑에서는 컨테이너 야적장 너머도 끝없는 밀림이다. 어찌 보면 낭만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새벽안개에 잠긴 야자수 가지 사이로 아침 햇살이 퍼지는 모습은 무언가 남국 특유의 낭만이 있을 것 같고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래서 서양 사람들이 열대를 낙원으로 생각했고 그렇게도 집요하게 식민지로 삼으려 했는가 보다.

이곳에 오면 뭐든지 다 편안할 것 같다. 1980년대만 해도 뱃사람들은 이런 이국적인 곳에 상륙해서 며칠 놀다가 다시 항해를 하는 로망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포트 켈랑에서 육지에 간 선원은 치통 때문에 치과에 간 용접공 한 사람뿐이었다. 보통 치과치료라는 것이 한번에 안 끝날 텐데 과연 한번에 가능한가 했더니 선원들이 주로 가는, 한번에 치료를 끝내주는 곳이 있다고 한다. 선원들의 삶, 터프하다. 컨테이너선은 가장 빠른 배고, 화물을 부리는 것도 빨리 해야 하기 때문에 선원들은 20시간도 안 되는 정박 시간 동안에 육지에 가서 놀고 돈 쓰고 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게 오늘날의 물류가 사람에게 가하는 스트레스다. 말라카에서 있을 법한 아름다운 추억은 포기한 채, 페가서스는 다시 바쁜 길을 나선다.

포트 켈랑을 떠난 페가서스는 안다만 해역으로 들어섰다. 안다만 해역은 인도의 동쪽 바다, 즉 벵골만의 일부이다. 그리고 벵골만은 더 큰 바다, 인도양의 일부이다. 여기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여 스리랑카의 남쪽을 살짝 스쳐서 인도의 왼쪽으로 나가면 완전히 망망대해인 인도양이다. 이곳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주요한 해상통로이고 고속도로같이 배들이 좌우로 오가는 곳이지만 점점 서쪽으로 가면서 배들을 보기가 힘들어진다. 아무래도 항구에서 멀어지니까 배들도 뜸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아주 평화로운 풍경이다. 대단히 습하고 끈적한 동남아의 공기 속에 풍경이 찐득하게 녹아 있는 듯하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뚫고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것은 원혼들의 소리다. 안다만 해는 1987년 11월29일 북한의 공작원 김현희가 중동에서 노동자들을 가득 태우고 오던 대한항공(KAL) 여객기를 폭파시켜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킨 곳 아닌가. 김현희 사건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의혹 중에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발표한 대로 항공기 선반에 올려놓을 수 있는 라디오와 술병 크기의 폭약으로는 여객기가 구조신호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산산조각 날 수 없다고 하는데, 안다만 해는 KAL 858기가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폭발하여 어느 지점으로 어떤 모양으로 추락했는지 보았을 것이다. 바다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안다만 말을 안 하는 것일까. 수많은 원혼들의 소리를 뒤로하고 페가서스는 서쪽으로 계속 나아간다. 기계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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