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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12 20:30 수정 : 2011.10.26 11:50

다양한 형태와 두께의 강철로 된 페가서스가 잔잔한 홍해를 항해하고 있다.

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 ⑨ 항해하는 사물들의 변증법
철이 없었다면 해운 발달 못했을 것
물, 배의 근거이자 마귀의 손이기도

배가 운항한다는 것은 배를 이루는 쇠와 물과 사람과 대기와 화물을 이루는 온갖 물질들 사이의 미묘한 조화를 요구한다. 선박과 항해에 관계된 물질들은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편리하면서 동시에 위험하고, 이로우면서 동시에 해롭고,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대단히 변증법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항해하면서 만난 사물 아홉가지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 강철 굳건하고 강하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열에 약하며, 삭막하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의외로 온갖 부드러운 모양을 하고 있다. 배는 강철로 된 조각작품의 거대한 갤러리다. 강철은 적절한 빛을 받아 빛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우아한 물건으로 변한다. 많은 사람들은 쇠로 만든 배가 뜨는 것이 신기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만 알면 그것이 쇠건 돌이건 같은 용적의 물보다 가볍기만 하면, 어떤 것이든 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물 위에 떠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배는 나무로 만들었지만 13만톤이나 되는 배를 나무로 만들 수는 없다. 만약 철이 없었더라면 구리나 알루미늄같이 훨씬 비싼 금속으로 배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비용 때문에 해운업과 항해술은 오늘날같이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 물 부드럽고 형태가 없지만 많이 모이면 강해지며, 형태가 있는 것들(배, 항만시설)의 형태를 변형시키거나 파괴해 버린다. 에너지가 실리면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것으로 변한다. 파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배에서 쓰는 물은 밸러스트 워터(배의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 넣는 바닷물), 청수(淸水: 해수를 걸러서 만들며, 먹지는 않고 청소나 허드레 용도로만 쓴다), 식용수(병에 든 미네랄 워터만 마실 물로 쓴다), 오수(汚水: 주방에서 설거지하거나 청소하고 난 물)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물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출렁이고 때리고 밀쳐낸다. 물은 배를 떠 있게 하는 지지체이지만, 또한 거대한 장애물이자 재난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배는 물에 적응해야 한다. 배가 물을 바꿀 수는 없다. 대양의 물은 무한대의 양이고 무한대의 에너지다. 그리고 대양의 물은 하늘과 한패다. 하늘이 사나워지면 물도 사나워진다. 물은 배를 있게 하는 존재의 근거지만 배를 없앨 수 있는 마귀의 손이기도 하다.

■ 벙커시유 기름 중에서 가장 정제가 덜 된, 싼 연료다(항해 당시 시세로 톤당 500달러). 페가서스는 하루에 250톤 정도의 벙커시(Bunker C)유를 쓴다. 만일 벙커시유 가격이 올라가면 해상운송료가 올라갈 것이고 그러면 해상으로 날라야 하는 모든 물건들의 값이 다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배의 굴뚝을 보면 10만마력의 힘을 내는 엔진답게 엄청난 양의 시커먼 연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배 한 척이 배출하는 매연의 양은 엄청난 것이지만, 그것이 나르는 컨테이너 하나씩과 비교해 계산해 보면 그것들을 개별적으로 트레일러에 실어 육상에서 운송하는 것보다 오염물질을 덜 배출한다. 해상운송이란 비용, 환경적 요인, 시간이 곱해진 정교한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다.

쌀밥과 고기와 홍합국으로 짜인 필리핀식 식사. 국에는 시금치와 생강과 고추가 들어 있다.
■ 쌀 오늘날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화물선 선원들은 대부분 필리핀 사람들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쌀을 많이 먹는다. 아마 한국 사람보다 더 많이 먹는 것 같다. 그들의 식사는 항상 밥과 튀긴 생선이나 돼지고기, 채소볶음 이런 식으로 구성돼 있다. 쌀이 없다면 필리핀 사람들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항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배에서 쌀은 벙커시유보다 더 중요한 연료다.

■ 채소 16세기 전까지 많은 선원들이 몇달씩 채소를 못 먹고 항해하다 죽었다. 신선한 채소를 먹으면 괴혈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은 사상 처음으로 괴혈병에 의한 사망자를 내지 않고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제임스 쿡(1728~1779) 선장이었다. 채소는 많은 선원들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더 큰 바다로의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채소는 철이나 디젤 엔진, 항법장치 이상으로 항해에서 중요하다. 어떤 첨단장치가 나와도 사람이 살지 않고는 항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에는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병으로 죽어 빈 배만 유령선처럼 항구에 들어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항해에서도 채소는 쌀 못지않게 중요한 연료다.

가장 중요한 연료는 쌀·채소·향신료
사람이 배에서 제일 알 수 없는 존재

■ 향신료 16세기에 포르투갈이 공격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하여 무역을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수입했던 화물이었다. 이제 후추가 없는 식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향신료의 수입은 항해의 중요한 계기이면서 유럽인뿐 아니라 전세계인의 입맛을 크게 바꿔 놓았다. 물론 향신료 때문에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같은 유럽 나라들이 아시아에 진출하여 해상패권을 잡고 식민지를 개척해 나갔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구 어느 곳이던 위성항법장치(GPS)의 도움을 받아 누비는 21세기 첨단화된 배의 식당에 있는 후추를 보면서 ‘바로 너희가 이 먼 바다로의 항해를 시작하게 한 일등공신이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 전기 배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 같은 시설이다.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펌프(밸러스트 펌프, 연료 펌프, 윤활유 펌프, 해수 펌프, 청수 펌프 등), 주방기구, 각종 제어 장치와 컴퓨터, 조명기구, 냉난방 장치 등 전기를 필요로 하는 곳들이 아주 많다. 배는 서 있는 동안에도 각종 펌프를 돌려야 하고 냉동 컨테이너를 가동해야 하기 때문에 전기 생산을 멈출 수 없다. 어차피 발전기는 항상 돌아가므로 배에서는 전기를 아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형광등 한 개쯤은 그냥 켜놔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 매연을 내뿜는 디젤 엔진이 돌아간다. 물론 배에서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형광등 한 개쯤 덜 켜라는 것은 우스운 얘기겠지만 전체적으로 소모되는 전기의 양을 줄이면 매연도 덜 배출되지 않을까?

■ 컨테이너 이 배의 주인공인 컨테이너 얘기를 빠뜨릴 뻔했다. 무려 6천개의 컨테이너가 겹겹이 쌓인 채 계속 같이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잊은 것 같다. 그들이 존재감을 알릴 때는 배가 기울어질 때 삐걱거리는 것과, 크레인으로 들어서 바닥에 놓을 때 쾅 하고 큰 소리를 낼 때뿐이다. 1956년에 컨테이너가 표준화되어 해상 운송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컨테이너는 역사적인 물건이다. 전에 지리산 근처에 갔다가 세계에서 제일 큰 해운회사인 머스크의 컨테이너가 트레일러에 실려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컨테이너가 어느 먼 나라의 항구를 떠나 지리산까지 오게 된 파란만장한 경로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 사람 가장 알 수 없는 물건. 기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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