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8.19 20:42
수정 : 2011.10.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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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유 운반선이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게 해적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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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 ⑩ 21세기의 해적과 세계질서
‘선박자동식별장치’ 전원 끄고
골판지로 창문 가려 등화관제
유엔규약은 ‘해적과 싸우지 말라
’해적들 기술과 제도 틈 파고들어
2011년 2월3일. 설날이다. 선장은 모든 선원을 브리지로 모이게 했다. 설날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해적에 대한 주의사항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내가 배에 탄 이래 모든 선원이 모인 것은 처음이다. 페가서스는 해적이 많이 출몰하는 인도양의 소코트라섬 부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페가서스가 소속된 프랑스 해운회사 시엠에이 시지엠(CMA CGM)뿐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선사의 배들은 모두 인도양을 통과해야 하므로 해적의 위협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최근 들어 해적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시엠에이 시지엠의 7000TEU급 컨테이너선인 바그너와 베르디가 공격당할 뻔했다. 음악가들을 골라서 공격하는 해적. 이제 별자리(페가서스)를 공격할 차례인가?
컨테이너선이 해적 방어에 유리한 것은 순항속도 24노트로 화물선 중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다른 종류의 배들은 보통 14~18노트 정도의 속도로 순항한다. 벌크 캐리어(곡물, 석탄 등 포장 없이 원상태로 실리는 화물들의 전용 운반선)나 원유 운반선은 화물을 가득 실으면 흘수선(선체가 물에 잠기는 범위)이 아주 깊어져서 ‘건현’(freeboard: 수면에서 갑판까지의 거리)이 대폭 낮아진다. 이와 달리 컨테이너선은 건현이 높아서 해적들이 올라오기 힘들다. 그런데도 최근 컨테이너선 바그너와 베르디가 공격당할 뻔한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달려 해적들을 피했고, 한동안 따라오던 해적들은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배의 어떤 부분이건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는 것에 전혀 제한을 두지 않던 선장이 이날의 미팅만은 비디오로 찍지 말라고 한다. 보안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일부터 갑판으로 통하는 모든 문은 단단히 잠그고 갑판에는 냉동 컨테이너의 관리같이 꼭 필요한 때만 나가도록 주의를 주었다. 이제 한동안 갑판으로 나가서 햇볕을 쪼이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다. 그리고 주간에는 정기 근무자 외에 사관 한 명이 추가로 브리지에서 해적 감시 근무를 서고, 야간에는 두 명이 추가로 근무를 선다. 만일 해적들이 배에 올라오면 어디를 통해 도피한다는 계획까지 하달한다. 비상경보가 울리면 선원들은 중앙 사무실로, 사관들은 브리지로 모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들을 하자 선원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만일 해적들이 선원들을 인질로 잡으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나도 같이 인질 노릇을 해야 하나, 아니면 나는 손님이라고 말하면 봐주려나. 착잡한 노릇이다.
그날 저녁 6시. 바그너와 베르디가 인도양에서 해적들에게 공격당할 뻔한 소코트라섬 근방에 들어서는 시간이다. 그런데 정작 해적에 대한 페가서스의 대비책은 소프트한 것들이다. 우리 배에서 한 일은 밤에 눈에 띄지 않도록 항법등을 뺀 모든 등을 끄고 등화관제를 위하여 창문을 골판지로 가린 것이다. 우리 배에 대한 정보를 다른 배에 알려주는 ‘선박자동식별장치’(AIS: 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는 껐다. 전파 발신을 제한하는 일종의 무선침묵인 것이다. 유엔안전규약은 민간화물선에 총을 싣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해적들에 맞서 싸울 수는 없고, 유엔안전규정도 해적들과 싸우지 말고 순순히 협조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해적을 막는 대비책으로 갑판 둘레에 철조망을 두르는 방법이 있지만, 설치하는 데 일주일, 다시 철거하는 데 일주일이 걸리는 큰 작업이다. 만일 해적이 배에 올라탔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싸우려 들지 말고 순순히 행동하라는 것이다. 결국, 결론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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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가 페가서스를 호위해준 프랑스 해군의 라파예트급 스텔스 함인 구프라트. 아래는 해적들이 모선으로 쓰고 있는 선박들. 아래 오른쪽 인도 선박 프란탈라이는 인도 해군의 공격으로 격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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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세계의 질서란 어디 간 것일까? 왜 이런 일이 21세기에 일어나는 것일까? 정말 한심하고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리산에 갔는데 산적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가진 것을 몽땅 빼앗겼다고 상상해 보라. 물론 21세기라고 모든 일들이 합리적이고 납득할 수 있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경철 선생이 쓴 <대항해시대>의 해적 부분을 보니 해적은 근대의 해상무역 체제가 낳은 부산물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저런 식으로 국가와 특정한 관계를 맺어왔고, 국가는 필요하면 그들을 이용하다가 필요가 없으면 토벌하고 하는 식이었다. 결국 해적의 등장이란 근대 국가권력이 해상패권을 장악하자, 또다른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이 도적세력으로 나서면서 형성된 것이다. 해적은 근대의 산물이자 근대를 벗어난 힘이다. 그런데 요즘 악명 높은 소말리아의 해적은 성격이 다르다. 소말리아는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친미정권이 무너진 이래 십수년간 정부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해적을 통제할 수가 없다. 이 해적들은 국가권력의 공백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2월5일 토요일, 브리지에는 거의 매일 한 건꼴로 해적의 공격 시도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오후 2시에 페가서스의 8마일 뒤에 아주 작은 배가 시속 5노트의 느린 속도로 따라오고 있는 것이 레이더에 잡혔다. 선장은 그게 해적일 수도 있고 작은 어선일 수도 있다고 했다. 저녁 무렵 선장이 직접 받은 이메일 메시지를 들고 브리지에 올라왔다. 시엠에이 시지엠 소속의 쇼팽이 공격당할 뻔했다는 것이다! 쇼팽이라면 원래 내가 부산에서 타려고 했던 그 배가 아닌가! 홍콩에서 그 배가 우리 배보다 먼저 출항하는 것을 보았고 어젯밤쯤 인도양 어디선가 앞질렀다고 했는데 우리 배를 뒤따라오다가 해적에게 당할 뻔한 것이다. 결국 아까 낮 2시에 우리 배 뒤에 있던 작고 느린 배가 쇼팽을 공격하려 했던 그 배라고 선장은 추정한다. 그러면서 아드레날린이 솟을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껄껄 웃는다. 난 이런 종류의 아드레날린은 원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영화는 다시는 안 볼 테다.
2월6일 일요일 오후 1시쯤, 레이더 스크린상에 좌현으로 17마일쯤 수평선에 해군 함정으로 보이는 배가 보인다. 좀더 시간이 지나자 망원렌즈로 바싹 찍을 수 있었다. ‘F714’라는 헐넘버(Hull number: 함선의 고유번호)를 확인해 보니 프랑스 해군의 라파예트급 스텔스 함인 구프라트이다. 페가서스가 프랑스 배라서 프랑스 해군이 호위해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해군의 호위를 받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오늘 자정쯤이면 아덴만의 국제공용통로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는 모든 배들이 일정한 통로를 따라 항해하며 재화중량 3만톤 이하의 선박들은 군용함정의 콘보이(호위)를 받기 때문에 많은 배들이 눈에 띌 것이다.
해적을 간접적으로나마 겪고 나서 나는 우리 시대의 테크놀로지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테크놀로지가 떠받쳐 주고 있는 질서라는 것은 완벽하지도 않고 영구하지도 않다. 이 세계를 이루는 본질적인 구성요소는 혼란이다. 인간의 문명은 그 속에 테크놀로지와 프로그램이라는 작은 영토를 지어놓고 그것을 세계라고 부른다. 그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허술한 틈들이 많아서 언제든지 혼란이 틈입할 수 있다. 사고나 천연재해, 해적이 그것이다. 해적들이 들고 있는 에이케이(AK)-47 소총과 아르피지(RPG)로켓포는 모두 값이 싸고 구조가 단순한 무기들이다. 그들이 극단적인 로 테크놀로지(낮은 수준의 기술)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해적에 대한 대비책도 로 테크놀로지로 갈 수밖에 없다. 골판지, 철조망, 소방호스, 무저항 등이 그것이다. 해적의 존재는 거대하고 정교한 첨단 기술에 어떤 틈이 있는지 밝혀주는 어두운 등불이다.
이영준 기계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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