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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라색으로 표시된 곳이 제일 기상이 안 좋은 상황을 가리키는 곳으로서, 980헥토파스칼의 저기압이 형성돼 있다. 본 보야지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배가 스페인 비스케이만으로 진행할 때 어느 정도 세기의 롤링을 할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이 조건에서 계속 운항하면 목적지인 사우샘프턴에 언제 닿을지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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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 12 강철배를 움직이는 인터페이스
기계는 인간과 환경 사이 인터페이스
배에선 엔진·앵커 아닌 소프트웨어
* 본 보야지 : 기상예측 프로그램
이번 여행을 위해 몇가지 책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배 안에 있는 책들이었다. 배의 브리지(사령실)에는 각종 매뉴얼들이 꽂힌 책꽂이가 있는데, 거기에는 육지의 책방에서는 찾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전세계의 항구에 대한 자세하고 전문적인 정보, 입출항 절차, 배에 화물을 묶는 요령, 비상시에 대처하는 절차들에 대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거기에는 ‘솔라스’(SOLAS; Safety of Life at Sea)같이 상선의 안전과 선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규정들도 있다. 나는 한 달간 그 모든 책들을 마스터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배에 헬리콥터가 내리는 작업 과정에 대한 책자를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헬리콥터가 배에 내릴 경우 바닷바람이 심하므로 기상조건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기상조건만이 아니다. 배의 연돌(굴뚝)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도 주의해야 하고, 그 매연에는 검은 입자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것이 헬리콥터 엔진의 공기흡입구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고 적혀 있다. 헬리콥터가 배에 착륙할 때는 연돌의 매연이 헬리콥터로 향하지 않도록 접근방향을 미리 설정해야 한다는 내용도 보인다. 그런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찬 공기이다. 겨울에 헬리콥터가 배에 착륙하려 할 때 바다의 찬 바람이 헬리콥터 엔진의 공기흡입구에 들어갈 수 있다. 이때 엔진이 꺼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헬리콥터의 엔진은 사람의 호흡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에 찬 공기를 들이마시면 감기가 걸리듯이 헬리콥터 엔진도 찬 공기에 약한 것이다!
그런 점들을 보면서 인간과 거친 환경 사이에 놓여서 인간이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들은 중요한 인터페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페이스라는 말은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자 인간과 컴퓨터를 이어주는 매개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라는 것을 만들어 환경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터페이스의 문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즉 기계는 거친 환경을 어떻게 견뎌내고 인간은 그 기계의 도움으로 어떻게 환경을 이겨내느냐가 인터페이스의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배를 사방으로 뒤흔들며 몰아치는 파도의 폭력, 바닷물에 포함되어 금속을 부식시키는 염분, 조류의 방향과 세기, 선체 표면에 달라붙어 운항속도를 떨어뜨리고 무게를 증가시켜 연료 소모를 늘리는 다양한 바다생물들, 바람의 방향과 세기 등 배가 상대해야 하는 자연의 조건은 참으로 많다. 배는 그런 환경에 견디도록 만들어져서 인간과 환경을 매개하는 인터페이스이다. 이번 항해에서 내가 관찰하고자 하는 중요한 지점은 그런 인터페이스가 어떻게 거친 바다 환경을 견디도록 만들어져 있고 실제로 작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 달간의 항해에서 본 페가서스는 어떤 환경적 요인에도 끄떡없이 버티는 성채와도 같다. 물론 선원들이 수시로 청소를 하고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여기저기를 수리하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다.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배에 있는 온갖 기계들을 둘러보니 최고의 기계는 출력 10만마력의 메인엔진도, 17톤에 달하는 앵커도, 4천마력의 발전용 디젤엔진도 아니다. 물론 그런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기계들은 다 압도적인 규모와 거기 걸맞은 ‘포효’를 가지고 있다. 그 기계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크고 강력하다. 초현실적이고 숭고미가 느껴지는 기계들이다. 물론 그런 기계들이라고 해서 미련하게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온갖 정교하고 세심한 주의와 관리가 있어야 돌아가는 것들이다. 기관장의 유에스비(USB) 드라이브를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그가 관리하는 모든 기계들에 대한 사항들을 담은 엑셀 파일이 수도 없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들은 거인 같은 존재들이다. 크기와 힘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정말 인기 있는 사람이 노래, 말솜씨, 춤과 더불어 개인기를 가지고 예능프로를 달구는 연예인이듯이, 다양한 재주를 가진 소프트웨어가 무지막지한 하드웨어보다 더 어필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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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엔진의 12개의 실린더 각각의 배기가스 온도가 몇 도인지 알려주는 디스플레이. 각 실린더 위에 클릭하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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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파도·놀 방향과 주기까지 알려줘 역시 새로운 요술상자는 디지털이었다. 인간과 환경을 매개해주는 인터페이스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363미터라는 길이와 13만톤이라는 무게는 마치 거대한 댐이 홍수를 막아주듯이 어떤 환경 조건도 이길 수 있는 보루인가? 역시 해결사는 디지털이고 소프트한 것이었다. 배에서 만난 최고의 기계는 ‘본 보야지’(Bon Voyage)라는 기상예보 프로그램이었다. 구글 어스가 그랬고 유튜브가 그랬고 위키피디아가 그랬다. 그것들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들이 열어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와, 새로운 차원의 정보의 세계에 모든 사람들이 밤을 새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본 보야지가 그랬다. 구글 어스가 인터넷과 위성사진의 결합이듯이, 본 보야지는 기상정보와 항해정보를 결합하고 있다. 즉,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기상정보에 내가 가고 싶은 진로를 입력하면 앞으로 24시간 뒤에 그 진로에 어떤 방향에서 어떤 세기로 바람과 파도가 닥칠지 예보해준다. 이 기계가 스마트한 것은, 그런 것뿐 아니라 배의 크기와 속도, 연료량을 넣어주면 앞으로 몇 시간 뒤의 기상조건에서 어디쯤 가고 있을지까지 예측해 준다는 점이다. 왜냐면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느냐, 파도가 어느 방향에서 치느냐에 따라 배의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배의 크기를 바탕으로 해서 어떤 파도에서 배가 어느 정도나 기울지 예측할 수 있다. 어떤 구조물이든지 공진(resonance: 외부에서 온 진동, 신호가 덧붙여져 특정한 물체의 진동이나 신호를 강화시키는 현상)에 걸리면 버티지 못하고 파괴돼 버리는데, 배가 그 길이에 맞는 놀(swell: 일반적인 파도(wave)와 달리 주기가 길어서 큰 선박도 파괴해 버릴 수 있는 물의 움직임. 놀은 아주 큰 에너지의 집적으로만 일어난다)에 걸려 흔들리기 시작하면 두 동강이 나버린다. 그래서 놀의 주기와 배의 주기가 일치하는 롤의 각도는 몇 도이고, 컨테이너선을 전복시킬 수 있는 파라메트릭 롤(놀의 주기와 배의 진동 주기가 들어맞아 진동이 배를 파괴할 정도로 강력해지는 현상)이 몇 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예측해 준다. 또한 컨테이너선은 뒤쪽에서 놀이 오면 조종하기 힘들어지므로 어떤 방향으로 항해해야 할지도 예측해 준다. 페가서스는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와 대서양을 북상하여 영국으로 가게 되어 있다. 본 보야지는 대서양 한가운데 980헥토파스칼의 저기압이 놓여 있고 높이가 10미터에 달하는 놀이 일고 있다고 예보해 준다. 이 정도면 태풍에 해당하는 세기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비스케이만은 최악의 상태라고 한다. 선장은 그런 상태의 바다에 나가면 페가서스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장이 날씨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리하여 본 보야지는 우리 배더러 대서양 쪽으로 항해하지 말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해안으로 바싹 붙어서 항해하라고 일러준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수시로 어디서든 이메일을 체크하며 빠르게 일을 처리한다. 그리고 도대체 이게 없을 때는 어떻게 일을 했을까 궁금해한다. 마찬가지로, 본 보야지가 없었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항해를 했을까 싶다. 기압이 낮아지고 놀이 거세질수록 붉은색에서 핑크빛으로 바뀌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도 예쁘지만, 날씨에 맞춰서 항해 진로를 예측해 준다는 그 기능과 온갖 부가 기능들이 아름다웠다. 본 보야지 덕분에 나는 제시간에 항해의 끝인 사우샘프턴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본 보야지! 기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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