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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쪽의 절벽이 모로코 땅이고 가까운 쪽은 스페인 쪽인데 신기하게도 두 대륙의 물은 서로 섞이지 않고 뚜렷이 다른 색깔로 나란히 달린다. 지브롤터의 묘한 지정학적 위치를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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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대양횡단 기계탐험기 14 지브롤터
많은 교통량·급한 조류…
몇백m간격두고 충돌할뻔
지브롤터 해협. 어렸을 적부터 무척이나 궁금하던 곳이었다. 세계지도를 보면 아프리카의 북쪽 끝(최북단은 아니다)과 유럽의 남쪽 끝(최남단은 아니다)이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나의 중학교 시절 지리부도의 스케일로 보면 거대한 두 대륙이 거의 붙어 있는 듯이 보였다. 두 대륙이 잘록 들어간 곳에 아주 좁은 해협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렇게 특이한 지형이라면 도대체 땅과 바다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프리카와 유럽은 어떤 모양으로 만나고 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래서 지브롤터 해협 통과는 이번 여행의 꽃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타고 통과한다는 것은 바닷사람을 빼고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무척이나 진기한 경험이다.
그런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 지브롤터 해협의 양쪽에는 충분히 기괴한 경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럽의 남쪽 끝은 스페인이지만 영국령인 ‘지브롤터’라는 작은 도시가 있고, 그 옆에는 흰 암질로 된 바위산이 지중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모로코 쪽은 세우타인데, 그쪽도 험상궂은 바위산이 버티고 있다. 두 대륙이 만나는 폭 13킬로미터의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양쪽은 서로 자기 쪽이 세상의 끝이라는 듯 기묘한 풍경으로 버티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최남단, 땅끝, 최북단 이런 말들을 좋아한다. 사실 최남단이나 최북단 너머도 사람이 살고 있는 또 다른 땅이고 바다이므로, 어떤 끝이라고 해서 이 세상의 끝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은 땅의 끝이라는 것을 유독 강조하는 지리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유럽의 끝과 아프리카의 끝이 만난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다가왔다. 사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사람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두 지점일 뿐이다. 모로코 사람들은 헤엄을 쳐서 스페인으로 가기도 한다고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수많은 배들이 메우고 있고,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와 모로코의 탕헤르를 왕래하는 페리선은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다니고 있다. 많은 교통량과 급한 조류 때문에 지브롤터 해협은 항해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그런 것이, 많은 배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고, 아프리카와 유럽의 물흐름은 어찌나 다른지 두 물이 섞이지 않고 뚜렷이 색깔이 다른 채로 평행으로 달리고 있다. 지브롤터 해협은 지중해의 끝에 바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알보란 해라는, 길이 300킬로미터에 폭은 180킬로미터쯤 되는 바다의 끝에 있다. 알보란 해 표면의 바닷물은 대서양에서 지중해 쪽으로 흐르고, 염도가 더 높은 깊은 곳의 바닷물은 지중해에서 대서양 쪽으로 흐른다. 그만큼 지브롤터 해협에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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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페가서스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한진 헬싱키가 바로 앞으로 스치듯 지나가고 있다. 지브롤터 해협은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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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포트(급좌회전)로 모면 페가서스는 말레이시아의 포트 켈랑을 떠난 지 15일 만에 모로코의 탕헤르 메드(Tangier Med)에 기항한다. 선장은 남미에서 콩을 싣고 아프리카의 남단을 돌아 아시아로 갈 때 47일을 육지에 전혀 닿지 않고 항해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15일간의 바다 생활도 참 힘들다. 어떤 책무도, 마감도, 스트레스도 없이 15일을 오로지 구경만 한다는 것이 왜 힘든지는 심리학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모로코에서 유럽으로 가는 관문인 탕헤르에는 수심이 얕아서 큰 항구가 없기 때문에 지중해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새로 만든 항구가 탕헤르 메드다. 사실 탕헤르 메드는 갠트리 크레인이 14대밖에 없는 아주 작은 항구다. 그간 봤던 상하이나 홍콩에 비하면 어촌의 작은 포구 같은 수준의 항구다. 탕헤르 메드는 북서쪽을 보고 있으므로 지중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향하던 페가서스는 급좌회전을 해야 한다. 총톤수가 20만톤이 넘는 길이 363미터의 페가서스가 급좌회전하는 모습은 마치 커다란 사건 같이 극적인 광경이다. 덩치만 보면 회전 반경이 아주 클 거 같지만 ,‘하드 포트(급좌회전)’를 명하는 선장의 한마디에 페가서스는 급격하게 몸을 왼쪽으로 틀며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페가서스의 몸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뒤로는 수면 위에 아주 큰 원호 모양의 자취를 남기며 장엄하게 좌회전한다. 방향타를 조절하는 러더 스티어링 기어(rudder steering gear)에 달린 네 대의 모터는 최고의 출력으로 방향타를 왼쪽으로 밀어붙였을 것이다. 엄청난 무게의 배가 선회하려면 방향타가 엄청난 수압을 받아내야 하므로 그것을 버티기 위해 모터들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좌회전을 끝내고 방향타를 중간에 놓고 눈앞의 탕헤르 메드를 향해 직진할 때 보니 폭 500미터의 항만 입구가 페가서스에게는 한참 좁아 보인다. 콘크리트 방파제 사이에 난 입구를 향해 다가갈 때 페가서스는 거의 오른쪽 방파제에 닿을 듯 위태롭게 다가간다. 나는 윙브리지(조타실 양쪽으로 뻗어져 나와서 배가 접안할 때 살펴볼 수 있는 구조물) 위에서 몸을 최대한 오른쪽으로 바싹 붙이고 페가서스가 어떻게 여기를 빠져나갈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페가서스의 우현은 방파제보다 더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대로 직진하면 방파제를 들이받을 것이다. 방파제에서 몇백 미터 안 떨어진 지점에서 페가서스는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간신히 입항할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선장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때 좌현(포트) 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모로코 도선사가 두 번이나 스타보드(우현)를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가서스는 대책 없이 오른쪽으로 갔던 것이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선장이 바로잡지 않았더라면 탕헤르 메드의 크지도 않은 방파제 시설은 페가서스에 들이받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많이 자동화된 큰 배를 모는 선장의 어려움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배가 크면 말썽도 크다’(Big ship, big trouble)고 선장이 말했던 것이 생생하게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로 해서, 지브롤터 해협은 기계와 지리와 환경의 복잡한 인터페이스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탕헤르 메드에서의 선적이 끝나고 이제 눈앞에 있는 좁다란 바다만 빠져나오면 대서양이다. 하지만 대서양의 날씨가 나빠져서 페가서스는 도로 지중해 안쪽으로 들어가서 나흘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바다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drifting)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시간만 보내는 것이다. 그 자리를 맴돌고 있으므로 전자해도에 나타난 페가서스의 궤적은 거의 변화가 없다. 그저 조류에 떠밀려 조금씩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지구 전체의 시간이 멎은 느낌이다. 주엔진도 멎었기 때문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지중해의 파도가 페가서스를 때려서 배 전체가 ‘쿠쿵!’ 하면서 울리는 소리뿐이다. 배가 쪼개지는 소리가 나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기관장은 ‘정상’이라며 나를 안심시킨다. 바다는 페가서스를 잠시도 놔두지 않는다. 밀도가 없는 시간이란 흘러가지 않는다. 대서양을 언제 볼 수 있을까. 기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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