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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동 1가 ‘천사 아줌마’ 집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명동을 취재하면서 수천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자의 모습이 나온 사진은 이 한장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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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공간과 사람, 명동 이야기’ 실험 프로젝트
<4회> [취재기] 우리는 왜 공간을 탐사했나?
“구도심의 모든 영역은 생동하고 있다. 재래시장들, 작은 가게들, 공장들, 건축물의 안 혹은 그 틈, 그리고 그 밖에서….(중략) 우리는 도시공간과 건축 속에 넘쳐나는 삶의 모습들을 보았으며, 너무나 일상적인 이것들이 우리 도시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임을 깨달았다.”(‘구가도시건축’ 조정구 대표 ‘기간의 도시’ 중.)
도시 공간 탐사자가 공간에서 읽어 내는 것은 결국 삶의 풍경이다. 공간 탐사는 공간의 구조를 살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우리가 명동을 보자고 한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명동을 보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자는 것, 그래서 명동에 투영된 ‘우리 시대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그 작업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공간 탐사에 대한 이론적, 실무적 지식이 전혀 없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정하는 것도 힘들었다. 명동 사람들이 언론 취재에 호의적인 편이 아니라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명동 공간 탐사에 보낸 지난 5개월은 시행착오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뉴스는 새롭지만, 뉴스의 내용과 틀은 ‘올드’하다
내가 공간탐사 작업을 할 때 소속된 팀은 ‘새뉴스발굴팀’이었다. ‘뉴스’가 늘 새로운 것인데, 뭘 또 ‘새뉴스’를 발굴하느냐고 비아냥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뉴스는 늘 새롭지만, 뉴스의 내용과 틀은 늘 ‘올드’하다는 것이 우리 팀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올드한 뉴스의 틀을 깨고 새로운 뉴스의 틀을 만들고자 했다.
팀장은 처음부터 ‘명동 프로젝트’가 새뉴스 자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언론사에 남을 아이템”이라며 무조건 ‘명동 프로젝트’를 하자고 부추겼다. “공간을 탐사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 사진, 영상을 결합한 방식으로 시도해볼 생각을 한 언론은 아직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령이라고 던져 준 말이 더 가관이었다. “야마(기자들 용어로 기사의 주제를 뜻하는 은어) 잡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몇 달 동안 명동에 가서 살다 와라. 그러면 뭔가 나와도 나오겠지. 시간은 충분히 줄게.”
시간은 충분히 준다고 그러는데, 명동 가서 그냥 몇 달 살다고 오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막막하고 두려웠다. 둔한 머리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제도 없는 기사를 취재하라니, ‘미친 것 아니야?’ 속으로 몇번을 후회했지만, 명동 프로젝트는 결국 내 몫이 되었다. 그때가 대략 3월 말쯤.
보고 또 봐도….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이게 아이템이 될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명동을 보라는 말을 공간 탐사 정도로 이해’했을 때쯤 2주가 훌쩍 가버렸다.
일단, 팀장 말대로 ‘명동을 한번 가보자’고 결심한 게, 4월14일이었다. 시청광장에서 시작해 롯데백화점을 지나 드디어 명동에 입성했다. 점심 먹고 나가서 해가 질 무렵까지 길거리를 봤다. 도대체 뭘 보라는 건지? 단지 ‘명동에 참 사람 많네. 예쁜 여자들도 많구나’라는 것 정도를 느끼고 돌아왔다. 그래서, 아예 다음날에는 사람만 보기로 했다. 표정을 보고, 걷는 속도를 보고, 누구랑 오는지를 보고, 어디로 가는지를 보고, 옷 색깔을 보고…. 호객 행위 하는 화장품 매장 직원을 찬찬히 쳐다보고, 건물엔 뭐가 있나 들어가 보고, 보고 또 보고. 그러다 지치면 냉커피로 목을 축였다.
한 사흘을 아무 생각 없이, 그러나 뭔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거리를 봤을까? 처음으로 뭔가가 보였다. 일본인, 중국인이 많다고 하던데, 한국 사람하고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혼자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일본 사람, 저 사람은 중국 사람, 저 사람은 한국 사람’ 하는 식으로 놀이를 했다. 그렇게 자세히 사람을 보니 일본 사람들은 삼삼오오 다니는데 대부분 지도를 끼고 다니고, 중국 사람들은 주로 쇼핑백을 많이 들고, 단체로 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며칠이 더 지나서는 일본인이 골목길 등에도 자주 나타나고, 중국인은 중앙우체국 부근 관광버스에서 내려 주로 큰길로 명동 나들이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명동에서 본 첫번째 발견이었다.
“어느 순간 공간이 말을 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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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울타리의 발견. 여기를 보면서 처음으로 명동의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간은 흐른다. 명동성당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흐름을 차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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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는 건물을 보았다. 큰길에는 무슨 건물이 있고, 거기에는 어떤 가게가 있는지, 골목 안에는 어떤 가게가 있는지를 살폈다. 그 다음에는 길을 보았다. 큰길과 작은 길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건물과 건물은 어떻게 구획이 나뉘는지를 보았다. 이때부터 뒷골목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명동의 속살을 발견하는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그런 다음 명동거리를 둘러싼 외곽 도로를 따라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명동성당도 가보고,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틈틈이 거리에서 사진과 영상도 정신없이 찍었다.(물론 그것들 대부분은 나중에 별 쓸데 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온종일 걷다 보면 발바닥에 벌겋게 물집이 올라왔다.
조금씩 명동의 공간들이 보이는 듯했다. 이제 건물의 층마다 뭐가 있고, 골목길에 붙은 구인 광고에는 뭐가 쓰여 있으며, 담벼락엔 어떤 ‘찌라시’들이 붙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골목 구석구석에서 매장 종업원들이 참 불쌍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술자리에서 팀장에게 그 동안 본 것을 브리핑했더니 “어느 순간 공간이 너에게 말을 걸 거야. 그걸 느끼면 희망이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건 팀장의 희망사항이었을 것이고, 공간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답답해 사무실로 기어들어 왔다.
이제, 공간과 관련한 논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간’, ‘공간 탐사’, ‘명동’, ‘명동 탐사’ 등 공간과 명동과 관련한 모든 검색어를 뒤졌다. 몇 편의 논문을 건진 걸 빼고, 1주일 동안 인터넷 검색도 별 소득 없이 저물었다. 그다음엔 지도와 지리, 공간과 관련한 책을 구해서 읽었다. 그렇게 훌쩍 두 달이 흐른 것 같다. 아직 공간은 나에게 아무 말이 없는데 말이다.
공간에서 사람으로 … ‘쌩’ 돌아서는 사람들
어느 날 팀장은 “공간은 그 정도면 본 것 같고, 이제 사람을 봐라”고 말했다. 공간도 막연한데 사람을 보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공간이 더 이상 안 보이니 사람을 봐야 했다. 그러나 사람을 취재하는 것은 공간을 취재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상가 사람들 얼굴 표정을 보면 말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늘 바빴고, 장사하는 것 외에 별다른 관심도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제일 친절해 보이는 화장품 매장 여직원을 공략했다. 그러나 그들도 너무 바빠서 몇 마디 나누기도 힘들었다. “명동에 사람들 많이 와요?” “네. 항상 많죠.” “일본인들은요?” “지진 이후에도 꾸준하게 오는 것 같아요.” “장사는 잘되나요?” “저는 종업원이라 그런 것 몰라요. 그런데 그런 것은 왜 물어요.” “저, 제가 명동 관련한 취재를 하고 있는데…” “그럼 기자세요? 저희는 취재 응대 안 해요. 그런 것은 사장님한테 물어보셔야 하는데…. 바빠서….”
뭐 대충 이런 식의 알맹이 없는 대화가 몇 초간 이어지다, 상대방이 ‘쌩’하고 돌아서는 바람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매장 사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만나기도 힘들뿐더러 만나더라도 “자세한 것은 본사 홍보실에 물어보라”고 말을 끊었다. 화장품 가게뿐 아니라 모든 가게가 비슷했다. 손님인 것 같을 때는 친절하다가도 취재나 인터뷰라는 낌새를 풍기면 손사래를 치거나 입을 닫았다. 바쁜 것은 알겠지만, 야박할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거절했다.
옛날 달러골목에서 만난 첫번째 명동 사람
3~4일을 그렇게 쓴맛을 본 뒤 변두리는 좀 한가하니까 그쪽부터 공략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 만나게 된 사람이 1회에 소개한 명동2길, 이른바 ‘달러골목’ 시계 수리방 아저씨였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옛날 명동을 기억할 만한 사람들을 여러 사람 소개해 주면서도 정작 자기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닫았다. 그래도 시계방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를 받으며 서서히 아는 사람을 넓혀 갔다. 그사이에도 건물을 올라 다니다가 불쑥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2회에 소개한 양품점 아저씨와 옥탑방 아저씨를 그렇게 알게 되었다. 이제 조금 사람들 만나는 것도 쉬워지고, 사람들이 이야기 도중 어디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충 머릿속 지도에서 위치가 그려졌다.
그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신나서 떠드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명동에서 봤던 것, 만났던 사람들을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오히려 내 이야기를 재미있어했다. 7월 중순 무렵에는 저동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집은 참 예뻤다. 올라가는 계단길도 그렇고, 담벼락 밑에 잘 가꾼 화분들이 너무나 정겨웠다. 주인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6번째인가 찾아간 끝에 8월 초 겨우 집주인(2회에 소개한 ‘천사 아줌마’)을 만날 수 있었다.
유난히 길었던 올 여름 장마
이렇게 외곽 취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할 즈음, 또 7월이 가고 8월 초에 접어들었다. 올여름 장마가 유난히 길어서 밖에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별로 길지 않았다. 다시 안쪽 상인들을 파고들었다. 소개에 소개를 받아 노점상을 취재할 수 있었다. 화장품 매장과 대형 매장을 홍보실을 통해 취재 섭외를 했으나 여러 차례 거절을 당했다. 심지어 어떤 화장품 매장 홍보실은 “제품과 관련한 홍보성 인터뷰만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심 끝에 매장에 들어가 어렵게 인터뷰를 딸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취재를 마친 뒤 기획안을 다듬고, 글을 쓰느라 8월도 모두 흘러가 버렸다. 보고 들은 것은 많은데 글로 옮기는 순간, 생생했던 명동 이야기는 체로 모래를 걸러낸 것처럼 알맹이가 쑥 빠져버려 애를 먹었다. 며칠 밤을 새워도 글은 좋아질 기미가 없고, 마감시간을 몇 번이나 어겨가며 8월을 보냈다. 날마다 피곤과 답답함에 한숨이 밀려왔다.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가장 폐쇄적인 공간
어렵게 ‘도시 공간과 사람, 명동 이야기’ 실험 프로젝트가 세상에 나왔다. 취재기를 자세히 쓰는 것은 취재하면서 내가 겪었던 것도 명동의 한 단면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때문이었다. 내가 겪은 명동은 가장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가장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명동, 아니 명동 사람은 아무에게나 쉽게 말을 걸지 않는다. 명동은 늘 바쁘다. 명동이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장사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판단의 기준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공간과 사람 이야기’ 따위는 한가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명동이라는 공간을 사람이 만들어가는 모습이다. 게다가 그 각박한 소비의 중심지에서도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이제, 다시 명동을 가면 공간과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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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에서. 명동은 여전히 성과 속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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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신기섭·박종찬 | 글, 사진 취재·편집: 박종찬 pjc@hani.co.kr | 지도·슬라이드: 신기섭 | 개발지원: 원수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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