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03 22:02
수정 : 2011.12.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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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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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문학산책 /
영화 <족보>(임권택 감독, 1978)를 보셨소? 일본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1930~1975)의 소설을 대본으로 삼은 것. 이 작품은 ‘나’의 담당 구역인 수원군에서 창씨개명에 반대해 자결한 선비 설진영을 다룬 것. 실제 인물 설진창(薛鎭昌, 전북 순창)을 모델로 했는가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소설이 갖는 의의는 일본 작가가 썼다는 점. 기원(紀元) 2600년을 겨냥해 총독부가 제령 19·20호로 강행한 이른바 ‘창씨개명’(1940.2.11~8.10)이 조선에 가져온 충격의 어떠함은 위의 <족보>(1961)에서도 일정한 수준에서 드러났다고 할 만하오. 그렇다면 창씨개명에 대한 한국 작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문인으로 맨 먼저 창씨개명에 나아간 것은 두루 아는바 이광수. 천황의 신민 되기를 창씨개명 속에 담았다고 그는 천하에 대고 여러 번 소리쳤소. 이 무렵 그는 동우회 사건 재판 계류 중(무죄가 된 것은 1941.11.17)이었고, 중요한 문학적 글쓰기에는 본명 또는 필명 춘원을 썼소.
윤동주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의 창씨개명은 1942년 1월 29일로 되어 있소. 도일과 대학 입학에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되오.
<창랑정기>의 작가 유진오는 이렇게 적은 바 있소. “대세가 몰기 시작해 저항은 싱겁게 무너져서 국민의 대부분은 총독부의 정책을 따르게 되고 보전(普專) 학생의 출석부도 거의 일본식 이름이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보전에서는 김성수 교장을 비롯 … 기타 창씨하지 않은 사람이 꽤 있었다. 총독부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편편야화>, 1974)라고. 그러나 총독부가 문제 삼지 않더라도 ‘설정 창씨’와는 달리 이른바 ‘법적 창씨’의 강제적 적용은 어김없이 받았던 것.
이상의 사례들은 조금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어느 수준에서는 이해될 만한 데가 아주 없지 않을 법하오. 그러나 다음 경우는 어떠할까. <국민문학>(1941~1945)을 주도한 최재서가 창씨개명을 단행한 것은 놀랍게도 1944년 1월 1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작년 말경 생각 끝에 나아갈 길을 깊이 결의해 1944년 1월 1일에 그 첫 순서로 창씨를 했다. 그 다음날 그것을 조선신궁에 가서 고했다.” 이 대목은 상식으로 이해하기 썩 어렵소. 그 이전까지는 최재서라는 본명으로 <국민문학>을 이끌어 왔고, 또 이 본명을 들고 제2회 대동아 작가대회에 나섰던 것.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인 특별 지원병 제도를 옹호하는 글(1943.12)에서도 본명으로 일관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국민문학>을 논의할 경우 1943년 12월 이전까지란 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적절할까. 다음과 같은 보조선이 이에 혹시 한 줄기 희미한 빛이라도 될 수 있을까. 하나는 경성제대 법문학부장을 역임한 일본인 교수(일본문학)의 회고. 어느 정초 학생 최재서가 집으로 찾아와 “당신들이 아무리 겁주어도 우리들 조선인의 혼을 빼앗을 수는 없다”라고 행패를 부렸다는 것. 다른 하나는 영문과 주임교수의 회고. 조선인 학생들이 그들의 민족 해방과 자유를 외국문학을 통해 갈망하고 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
어찌 창씨개명의 경우만 그러하랴. 어떤 역사적 사건도 상식으로 풀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 인문학이 서 있는 자리란 이 틈이 아니겠는가.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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