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31 18:29
수정 : 2011.12.13 16:34
|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
김윤식의 문학산책 /
미야모토 겐지의 고명한 <은하철도의 밤>이 아동문학일 수 없듯 황순원의 <소나기>(1953)도 그러하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 중세의 성곽처럼 숲속 구름 위에 솟아 있는 소나기 마을(양평군 서종면)의 출현(2009. 2. 25)을 그럴싸하게 설명하기란 썩 난처하오. 이 대단한 성곽은 혹시 양평군의 역량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긴 하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년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결말 부분의 이 한 줄에서 “여기가 소나기 마을이다. 여기서 춤춰라!”라는 명제를 이끌어낸 교수(경희대) 황순원의 총명한 제자들의 직관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렇기는 하나 성곽이란 시멘트나 벽돌로 분해되는 것. 양평읍으로 이사 갔다고 해도 한갓 지도상의 명칭으로 환원되는 것. 어느 것도 그럴싸한 설명엔 역부족이오. 그렇다면 숲속에 솟아 있는 저 존재의 실체란 새삼 무엇일까.
두말하면 군소리. 문학이자 소설이 아니겠는가. 소설이되 황순원식 소설이라는 사실이 그것. 그 숲속 구름 위에 솟아 있는 중세풍의 성곽이란 작가 황순원의 솜씨로 구축된 미학이었던 것. 그것이 미학이기 위해서는 먼저 설계도가 전제되는 법. 이를 범박하게 말해 창작방법론이라 부를 수도 있소. 그러나 황순원식 미학에서는 적절하지 않소. 투명한 건축용의 기하학적 설계도인 까닭이오.
보시라. 제일 먼저 또 철저히 소년, 소녀가 등장하오. 이는 아동도 아니지만 청소년일 수도 없는 것. 엄밀한 기하학적 대칭성일 뿐. 그 사이에 개천이 있고 눈에 뵈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소. 도시(서울)가 있고 시골이 있소.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가 있소. 근대와 전근대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가 있소. 이 징검다리 위에서 설계사 황순원이 곡예를 하고 있소.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이 그것. 보이는 징검다리와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를 잇는 제3의 징검다리까지 투명하게 드러낸 설계도. 그러기에 소년, 소녀는 한갓 기호일 뿐.
그것은 어린이가 미개인이거나 어른의 꿈의 투영이라는 시선에서 씌어진 저 <은하철도의 밤>과 얼마나 다른 미학인가. 그것은 또 엄밀한 기하학적 대칭성으로 치달은 <오감도>(1934)의 시인 이상과 얼마나 지척에 있는 미학인가. 그도 그럴 것이 작가 황순원은 이상과 함께 <삼사문학> 후기 동인이었으니까. 이들을 싸잡아 모더니즘이라 부른다면 득보다 손이 많을 터. 균형 감각에서 오는 것은 세련성이니까. 영어상용권이 대번에 이를 알아차렸음(<인카운터>(Encounter), 1959. 5, 유의상 역)이 어찌 괴이하랴.
원리적으로는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삶의 고층[古層])의 균형 감각. 이 대칭성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는 황순원 미학이 저 숲의 구름 위에 성곽으로 솟아올랐소. 이를 제일 흐뭇하게 바라볼 안목을 가진 설계자는 누구일까. <날개>(1936)의 작가 바로 그 사람이오. 참으로 다행히도 우리는 이들의 후예가 아니겠소. 이를 깨치는 순간, “이 바보!” 하고 조약돌 한 알 이쪽으로 날아오오.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