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가 29일 저녁 서울 양천구 목동 기독교방송국에서 생방송중인 스튜디오에 들어가 진행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최재봉의 공간
⑨ 정혜윤의 라디오
라디오 피디이자 저술가인 정혜윤의 ‘공간’으로는 그의 침대를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가 낸 첫 책이 <침대와 책>(2007)이었던데다,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서평 꼭지 제목 ‘새벽 세 시 책읽기’도 딱딱한 업무 공간보다는 부드럽고 안락한 침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꼼짝 않고 누워 책 읽기의 달인’을 자처하는 그에게 침대만큼 맞춤한 공간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머리 쪽을 제외한 삼면 프레임에 책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다는 그의 다다미 침대가 궁금했다.
전화가 끊겼다, 비상이다!
그러나 모든 궁금증이 그 해소를 위한 노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궁금증은 풀리지 않은 채로 남겨둘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정혜윤의 침대에 대한 호기심은 <침대와 책>을 읽는 것으로 달래고,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공간을 찾기로 했다. 바로 그의 일터인 <기독교방송>(CBS) 스튜디오다.
그는 지금 매주 일요일 저녁 일곱시부터 여덟시까지 방송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꿈꾸는 세상, 함께하는 세상”을 모토로 삼은 초대석 형태의 프로그램이다. 지난달 29일 저녁에 찾은 서울 목동 시비에스 사옥 3층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그는 제작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날의 초대손님은 모두 세 사람. 감정노동 없는 식당을 표방한 음식점 ‘베누’ 대표 정규삼씨, 사회적 기업 ‘두꺼비하우징’의 정상길 팀장, 그리고 얼마 전 <사라진 직업의 역사>라는 책을 낸 이승원 인천대 교수가 그들이었다. 이 중 정 대표는 전화로 연결하고 다른 두 연사는 스튜디오에 직접 나오기로 했다고.
정 팀장이 방송 시작 전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정혜윤이 그에게 주문한다. “두꺼비하우징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니까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세요.” 뉴스가 끝나고 드디어 방송이 시작되었다. 오프닝 멘트와 도로교통정보에 이어 전화로 연결된 정규삼 대표와 진행자의 질의응답이 오간다. 정혜윤은 ‘식당 직원을 트위터로 뽑는다는데, 어떻게 판단하는지?’ 같은 질문을 컴퓨터에 입력해 진행자에게 건넨다. 한창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갑자기 전화가 끊기는 사고가 생긴다. 비상이다! 진행자가 다른 아이템으로 돌리려는 걸 작가가 급하게 전화를 다시 연결한다. 끊겼던 질의응답이 속개된다. 휴! 방송을 만드는 이들은 큰 한숨을 몰아쉬어야 했지만, 지켜보는 쪽에서는 생방송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연사가 스튜디오에 와서 하는 나머지 두 꼭지는 별 차질 없이 마무리되었다. 철거와 재개발이 아닌 원주민들의 일자리 순환까지 염두에 둔 도시 재생을 꿈꾸는 두꺼비하우징, 그리고 인력거꾼과 기생, 변사, 차장처럼 지금은 없어진 직업들에서부터 오늘날의 비정규직 문제까지 직업의 변천사를 다룬 이 교수의 책 이야기 역시 “꿈꾸는 세상, 함께하는 세상”이라는 프로그램 모토에 어울려 보였다.
방송을 마친 정혜윤이 아래층 편성국에 있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짐을 꾸린다. 그의 자리는 한눈에도 책벌레 정혜윤의 공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온통 책투성이다. 책상 위와 아래, 의자 옆까지 무질서하게 쌓인 책들은 옆자리까지 침범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지난해 칠레 여행 중 그곳 서점에서 찍은 사진이 깔려 있다.
“지난 연말에 ‘라디오 피디가 말하는 라디오’라는 6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어요.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어떤 의미일까, 뉴미디어와 영상의 시대에 라디오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걸 알아보고자 했던 거죠. 갱에 갇혔다가 풀려난 칠레 광부들에게 육체적 안전만이 아니라 정신적 안전도 매우 중요했는데, 그 과정에서 ‘라디오 프로젝트’라는 걸 했더라구요. 라디오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간적인 미디어예요.”
정혜윤이 처음부터 라디오 피디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구체적으로 꾼 첫 꿈은 기자였다. 그 이야기를 그는 자신의 두번째 책인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2008) 서문에 썼는데, 책읽기에 빠져들었던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대학생 오빠가 서울에서 가져온 <전태일 평전>을 읽고서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공감하는 이가 없다면 소리가 나는 기계일 뿐 책도 그저 허구일 뿐
나는 오늘도 속삭인다 자, 한권의 책을 읽었으니 어떻게 다르게 살지?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우울할 때 혼자 들은 비밀 릴테이프
“당시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의 신문을 집어 오는 게 제가 하는 일이었어요. 나름대로 신문도 열심히 읽었죠. 그런데도 전태일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아마도 제대로 눈에 띄게 기사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어린 저한테는 전태일과의 만남이 충격이었어요.”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 몇 군데 언론사의 시험을 치다가 시비에스 피디에 합격이 되었다. 대학 졸업반이던 1992년이었고, 정식 발령은 1993년이었다. 그러니까 햇수로 20년째 피디 일을 하고 있는 것. “라디오 피디는 크게 보아 음악 피디와 시사 피디로 나뉘는데, 나는 균형이 맞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시사 피디를 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동안 그는 ‘김어준의 저공비행’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행복한 책읽기’ ‘시사자키’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청취자들 사이에 피디로서 자기 색깔을 확고히 새겼다. 요즘 한창 잘나가는 ‘나꼼수’의 김어준과 김용민, 그리고 소설가 공지영이 그의 프로그램 진행자였고, 역시 나꼼수의 정봉주와 주진우, 소셜테이너 김여진, 정신과 의사 정혜신 등도 출연진에 속해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20대였던 무렵의 정혜윤 피디는 ‘라디오의 비애’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아날로그 시대였잖아요. 아무리 열심히 준비한 방송도 그 순간뿐이었죠. 그런 점에서 신문기자를 부러워했어요. 글에 대한 동경, 텍스트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그리고 그 사라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하는 존재론적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사라짐은 라디오만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조건이잖아요.”
아날로그 시절의 방송은 모두 릴테이프에 녹음되었다. 당시 정혜윤에게는 비밀 릴테이프가 있었다. 그가 지난해 7월에 낸 다섯번째 책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는 그 릴테이프에 관한 인상적인 삽화가 나온다.
“녹음 당시의 헛기침, 코 훌쩍거리는 소리, 이상한 발음은 녹음 후에 모두 편집된다. 이상하거나 불필요한 소리들은 모두 방송용 가위로 잘라내는데 미장원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생각하면 된다. 어느 날 나는 그 잘려지고 쓰레기통에 들어갈 머리카락 같은 릴테이프 조각들을 모아 붙이기 시작했다. 코 훌쩍거리는 소리와 헛기침과 침 삼키는 소리, 이상한 발음과 말더듬이만으로 이뤄진 릴테이프의 길이는 점점 늘어나 그 길이가 60분가량이 되었다. 그 후 우울한 날이면 편집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누덕누덕 붙인 릴테이프를 듣곤 했다.”
바지런한 독서가라면 이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딩동댕! 정답이다. 김연수의 중편 <달로 간 코미디언>에 거의 흡사한 장면이 있다. 화자의 연인인 라디오 피디가 화자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릴테이프를 잘라내면 외로워진단 말인데….”
정혜윤은 자세한 이야기를 꺼렸지만, 그가 김연수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김연수의 소설 속 이야기는 정혜윤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는 또 다른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추운 겨울날 시골에 갔다가 소가 음메~ 하고 울 때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어요. 그게 너무 좋아서 소의 입김 ‘소리’를 녹음하고 싶었죠. 물론 입김이 녹음기에 잡히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음메~ 뒤의 묵음을 청취자들은 소의 입김으로 받아들이더라구요. 그게 바로 영상이 없는 라디오 청취자의 힘이죠.”
정혜윤은 라디오와 책 사이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노라고 힘주어 말했다.
“라디오는 듣는 사람의 적극적인 상상력과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저 소리가 나오는 기계일 뿐이에요. 책 역시 읽는 사람의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한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죠. 책의 운명은 어떤 독자와의 만남의 순간에 정해진다고 생각해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제가 한 권의 책이라면, 누가 나를 집어 드는가 하는 게 제 운명을 결정하는 셈이죠.”
“그 포장 뜯는 소린 정말 에로틱했죠”
기자를 꿈꾸던 소녀 정혜윤이 기자가 되기 위해 글쓰기를 따로 연습하지는 않았노라고 그는 말했다. 자신은 문학소녀도 아니었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도 없었노라고. 그가 지금처럼 여러 권의 책을 낸 저술가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한 인터넷서점 대표와 점심을 먹으면서 <마담 보바리>를 읽은 이야기를 신이 나서 했더니 저더러 독서 칼럼을 써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라구요. 그때까지 저한테는 책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숭배가 있었지 제가 독서 칼럼을 쓰고 책까지 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워낙에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칼럼을 쓰면 보고 싶은 책을 보내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러겠다는 거예요. 제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그때 제가 고른 책이 배달돼 왔을 때 포장 테이프를 뜯는 소리는 정말 에로틱했지요. 그 소리에 중독되어서 책을 읽고 글을 쓴 셈이에요.”
그렇게 해서 내게 된 첫 책 <침대와 책>과 두번째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전소설 열다섯편에 대한 서평 모음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2010)은 물론 여행서를 표방한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줄게>(2009)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책이다. 가장 최근 저서인 <여행, 혹은 여행처럼> 역시 사람과 책을 중요한 ‘여행’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는 지금 ‘새벽 세 시 책읽기’ 말고도 인터넷서점 알라딘과 시사 주간지 <시사인>에 책과 삶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혜윤은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자 책을 읽고 책에 관한 글과 책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저는 스스로를 독자라고 생각하지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없어요. 제 바람은 최고의 독자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제가 쓰는 글과 책도 어디까지나 제가 읽은 책에 대해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빚어진 것들이에요. 저는 원래 제가 읽은 책에 대해 말하는 걸 아주 좋아했어요. 특히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을 때 주로 책 얘기를 하죠. 제 글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해 주듯, 속삭여 주듯 쓰는 글이에요.”
라디오 피디 정혜윤에게 글이란 ‘인쇄된 말’이라 할 수 있을 법했다. 그의 글은 매우 감각적이고 심지어 관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것은 자세히 말하고자 하는 데에서 오는 감각이요 대상에 대한 주체 못할 애정에서 표출된 관능이라고 해야 옳을 터였다.
“제 삶의 화두는 ‘순간을 영원처럼’이라고 요약할 수 있어요. 제가 책을 읽는 이유도 순간을 영원처럼, 충만하게 살고 싶어서예요.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자, 책을 읽었으니 이제 어떻게 다르게 살지? 저에게 책읽기란 실제의 나와 내가 읽은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종의 시소 타기 같은 거예요.” bong@hani.co.kr
사진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영상은 한겨레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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