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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23 21:15 수정 : 2012.03.23 21:37

봄의 전령 매화와 산수유가 함초롬히 피어 있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심원재’에서 박남준 시인이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동/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⑫ 박남준 시인의 ‘하동 심원재’

지리산 골짜기에 혼자 산다면 무척 외로울 거라고 짐작하기 쉽다. 그러나 박남준 시인은 심심할 틈이 없다. 하루 걸러 손님들이 찾아오는 탓이다. 요즘 같은 봄꽃 철에는 손님이 더 끓는다. 오죽하면 “외로워야 시를 쓸 텐데, 외로울 틈이 없어서 시가 잘 안 나온다”고 푸념할 정도다.

봄꽃은 아직 일렀다. 매화 축제가 있는 주말을 앞두고 내려간 길이었다. 예년 같으면 벚나무 중에서도 성질 급한 녀석들은 꽃을 피웠을 3월 중순. 그러나 광양 매화도 구례 산수유도 앙증맞은 꽃망울이나 머금고 있을 뿐, 화신(花信)은 한참 멀어 보였다. 봄비라기엔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연인에게 바람맞은 이의 심사가 이러할까 싶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봄꽃은 시인의 집 다탁 위에 피어 있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이웃 동네다. ‘동쪽 매화’라는 뜻에 어울리게 매화가 지천인 곳이건만, 이곳에서도 매화는 보기 쉽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꽃이 벌어진 나무는 양지바른 언덕바지의 한두 그루 정도가 전부였다. 제대로 피어난 꽃을 본 것은 시인의 집 식탁 겸 다탁에 놓인 아담한 꽃병 위에서였다. 거기 꽂힌 나뭇가지에 흰 매화와 노란 산수유가 수줍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다.

이곳은 박남준 시인의 거처인 ‘심원재’(心遠齋). 동매리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시인의 집 방문 위에 걸린 편액은 도연명의 시 <음주> 제5편에서 따온 것이다. “사람들 속에 초가를 짓고 사노라니/ 수레와 말 시끄럽게 찾는 사람 없네/ 묻노라,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어지니 땅은 더욱 멀다네(…).”

버티지 못한 협박전화, 모악산방 뜬 사연

박남준 시인이 이곳 동매리 집에 산 세월도 어느새 10년째. 12년 동안 머물렀던 전주 모악산 자락의 ‘모악산방’을 떠나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 2003년 9월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문화운동 단체 등을 거쳐 방송국 구성작가 일을 하던 그가 고향 전주로 내려온 것은 1991년 3월. 그 무렵 새로 생긴 전주문화센터의 관장 일을 맡으면서였다. 말이 그럴듯해 관장이지, 봉급은 방송국 시절의 삼분의 일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전시와 공연 같은 문화 쪽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일이 없을 때는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거처가 문제였는데, 마침 아는 선배가 사 둔 모악산 자락의 무당집을 빌려 들어가기로 했다.

모악산 당집에서는 그리 큰돈이 들지 않았다. 아궁이를 만들고 작은 가마솥을 걸어 밥을 지어 먹으면서 전주 시내로 출퇴근했다. 방송국 시절이 매일 쳇바퀴를 돌리는 느낌이었다면, 산속의 삶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경이요 축복이었다. 이런 산중에서라면 돈을 쓰지 않고 사는 삶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게으르면서도 단호한 시인은 딱 1년이 되는 1992년 2월 말로 전주문화센터 관장직을 그만두고 자유인이 되었다.

“사표 내고 산속 집에 혼자 들어앉아 있자니, 백석의 시구마따나 외롭고 쓸쓸하더라구요. 그다지 높지는 않았던 게, 무명 시인이다 보니 원고 청탁이 없어서 아무런 수입도 생기지 않는 거예요. 적어도 굶지는 않으면서 최소한도의 자존을 지킬 정도의 경제활동은 해야겠더라구요. 계산해 보니 당시 돈으로 한 달에 20만원만 있으면 되겠다 싶어요.”

그 20만원을 마련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근근이 버티며 시집도 내고 산문집도 내면서 조금씩 이름도 알려지고 청탁도 늘었다. 1995년 창비에서 세 번째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를 내고는 “이름이 좀 떴다.” 원고 청탁이 밀려왔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시집 한 권과 산문집 두 권을 더 낸 다음, 2001년에 교육방송(EBS)에서 시인이 사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방송하자 반응이 뜨거웠다. 책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고, 책을 읽고 방송을 보는 것으로는 성이 안 차 모악산방을 직접 찾아오는 독자들도 많았다.

비록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무덤 같은 집”(<무덤 같은 집>)이라고는 해도 혼자 지내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모악산방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모양이었다. 새만금 방조제 건설을 비판한 그의 글이 협박 전화를 불러왔다. 단순히 겁을 주는 차원을 넘어 신변에 위해를 가하려 한다는 조짐이 도처에서 보였다. 더 버티기 어려웠다. 마침 그 1년 전 지인들이 악양에 그의 명의로 사 둔 집이 한 채 있었다. 지금의 ‘심원재’였다. 떠나기로 했다.

“결국 남쪽 악양 방면으로 길을 꺾었다/ 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 밥을 짓고 국 끓이며/ 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 밥상머리 맞은편/ 내 뼈를 발라 살점을 얹어줄 사람의/ 늘 비어 있던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이사, 악양> 앞부분)

동네밴드 하모니카 연주자로
지리산학교 선생님으로…
외로울 만하면 친구가 오고

통장에는 관값 200만원
먹을 것은 들판에 지천이니
담배·음반·생선값이면 족해요

빨래하고 장작패기, 술 약속 없으면 글쓰기

어둡고 습했던 모악산방에 비해 악양은 밝고 따뜻해서 좋았다. 빨래가 하루에도 두 번이나 마른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이사 뒤 보름 정도는 매일 빨래를 해 널었다. 혼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환경이 바뀌자 시도 한층 환해졌다.

“매화꽃 그늘 아래 키 발을 들고/ 꿀벌들이 코를 벌름거리고 있다/ 청보리 떼 몰려다니며 봄바람을 부른다/ 무딤이들 부부 소나무 사랑을 엿보았나/ 자운영 꽃 들녘 붉게도 달아올랐다/ 집집마다 햇차 덖는 향기/ 모내기 끝난 어린모들 안부가 궁금하여/ 구제봉에서 형제봉까지 안녕의 얼굴로 굽어보고 있다”(<악양> 앞부분)

그래도 처음부터 악양에 정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이사 온 이듬해인 2004년에 그는 도법·수경 스님과 이원규 시인 등과 함께 1년 동안 지리산, 제주, 부산, 경남 등지로 생명평화탁발순례를 다녔다. 이제는 정말 동네에 정착해 잘 사나 싶었던 2008년에는 다시 수경 스님의 부름을 받고 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를 다녀야 했다.

“그렇게 사대강 순례를 다녀왔더니 평소 동네에서 목례나 하고 지내던 이들이 대낮에 술을 사 들고 찾아오더군요. 농산물직거래장터 잔치를 열 텐데 유명 가수들 좀 섭외해 달라고. 그런데 그 예산이 터무니없이 적었어요. 논의 끝에, 가수들 공연을 유치할 게 아니라 아예 우리가 밴드를 만들어 보자고 얘기가 바뀌었어요.”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악양 ‘동네밴드’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악양 일대 지리산 자락에는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다가 귀농한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 가운데에는 기타와 드럼 같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이들도 있었다. 박남준 시인 자신은 하모니카 연주자이자 세컨드 보컬, 그리고 작사 및 작곡 등으로 밴드에 참여했다.

동네밴드 결성을 계기로 그는 동네일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2009년에는 도시 출신 귀농인들과 의식 있는 토박이 농사꾼들이 모여 만든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섬지사)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지리산학교’에서는 생활글쓰기 강좌를 이끌고 있으며, 출판사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도서관 ‘책보따리’의 서가를 풍성하게 채웠다. 동네밴드 연습실 겸 지역 문화공간인 ‘풍악재’의 건립에는 그의 신문 칼럼을 읽은 독자들의 후원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섬지사와 동네밴드, 지리산학교와 생태해설사 모임 같은 조직들이 종횡으로 얽혀서 악양은 일종의 느슨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동네 일에 관여하는 것 말고 심원재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삶은 단순하고 평화롭다. 아침에 눈뜨면 찻물부터 올려놓고는 밖으로 나간다. 화단과 집 앞뒤 마당을 돌면서 ‘오늘은 어떤 잎이 피었고 무슨 꽃이 올라왔나’ 유심히 들여다본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 음악을 틀어 놓고는 직접 만든 발효차를 마신다. 다시 밖으로 나가 운동 삼아 장작을 패고는 땀이 흐르고 목이 마를 때쯤 들어와서 또 차를 마신다. 그렇게 마시는 두 주전자 분량의 차와 몇 개비의 담배가 그의 아침인 셈이다.

밖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악양의 햇볕을 쬐고 방에서는 뒹굴거리며 책을 읽다가는 컴퓨터를 켜서는 자신의 팬카페에 들어가 댓글도 달고 새로 쓴 글도 올리고 하다 보면 열한 시가 좀 넘는다. 쌀을 씻어 놓고는 궁리한다. 달래강된장이 좋을까, 아니면 무밥을 해 먹을까. 그렇게 혼자 챙긴 소박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면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 그때쯤 우편배달부가 책과 편지를 전해준다. 방에서 뒹굴면서 편지와 책을 읽다가는 소화도 시킬 겸 장작 몇 개를 더 팬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서너 시. 술 생각이 나는 시각이다. 동네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연통을 넣어 보다가 다들 바쁘다고 하면 ‘할 수 없이’ 원고를 쓴다. 술 약속이 잡히면, 비록 원고 마감이 코앞이더라도 술부터 마시고 본다.

박남준 시인의 다탁 위 질그릇에 물에 띄운 백매, 홍매가 매혹적인 자태와 향기를 뽐내고 있다.(위) 박남준 시인이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앞마당을 내다보고 있다. 하동/김정효 기자
시인은 오늘도 꽃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가끔은 애마 ‘랄랄라’를 타고 지리산이나 섬진강으로 나선다. 악양 이웃에 사는 이원규 시인의 명품 바이크에 댈 바는 아니지만, 그의 노랑 스쿠터는 시인의 기동력을 놀랍게 향상시켰다.

“노랑 내 오토바이 달린다 남들은 모두 스쿠터라 하지만 노랑 내 오토바이 달린다 나는야 오토바이 아임 라이더 노랑 내 오토바이 달려봐 세상은 온통 노랗게 물든다 노랑 하늘 노랑 나무 노랑 물고기 노랑 산 노랑 강 노랑 바다…”(시인의 자작곡 <노랑 오토바이>에서)

오토바이 연료비를 포함해서 지금 그의 한 달 생활비는 20만원 안팎. 원고료와 강연 및 시낭송 사례비 등으로 한 달 평균 50만원 정도의 수입이 생기는데,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은 유니세프와 기아대책기구, 도시빈민학교 등지에 후원금으로 보낸다. 갑자기 일을 당할 경우 장례 비용으로 책정해 둔 ‘관값’ 200만원이 그의 통장 잔고 기준이다.

“생활비 들 일이 거의 없어요. 쌀은 사 먹을 겨를이 없이 농사짓는 친구들이 가져다주고, 김치 같은 밑반찬도 담가다 주는 사람들이 있죠. 나물과 된장국 재료는 텃밭이나 마당, 뒷산 같은 데서 뜯어다 대고, 겨울엔 애호박이나 무, 시래기, 말린 나물 같은 걸 활용하지요. 유일하게 돈 드는 반찬이 생선인데, 그나마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먹을까요?”

따져 보니 가장 큰돈이 드는 게 하루에 한 갑 내지는 한 갑 반을 피우는 담뱃값이란다. 술·담배와 함께 혼자 사는 그의 가장 큰 반려가 음악인데, 한 달에 댓 장 정도를 사는 시디값이 담뱃값에 이은 지출 제2위. 지난여름 유럽 여행길에서도 주로 거리 연주자들의 음반을 중심으로 열댓 장 정도의 시디를 사 왔다.

“우울증은 없는가요/ 너무 행복해서 탈이네요/ 충치, 틀니를 하셨는지/ 잘 씹어 먹어요/ 담배는 하루 몇 개비 피워요/ 갑으로 물어보세요/ 갑으로는 문항이 없는데요 그럼 열 개비 이상/ 약주는 하셔요 술은 몇 잔 정도/ 몇 병으로 물어봐요/ 최근에 병원에 가신 적이 있는가/ 생활은 어떻게 하시나 생활보호 대상자는 아니신가/ 시인이에요 시인”(<독거노인 설문 조사> 앞부분)

직장에서 승진하고 아이들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며 아파트 평수 늘리는 걸 행복으로 아는 도회인들에게 시인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은 원초적 그리움과도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그의 집에는 한 달이면 열흘 정도 손님이 든다. 책을 읽고 무턱대고 찾아오는 독자들도 있고, 문화계 안팎의 유명 인사들도 적지 않다.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도 수시로 그를 찾아와 위안을 얻고 돌아가곤 한다. 얼마 전 그들이 낸 음반에 실린 <섬진강 박시인>은 바로 박남준 시인을 노래한 곡이다.

“연분홍 봄볕에도 가슴이 시리더냐/ 그리워 뒤척이던 밤 등불은 껐느냐/ 누옥의 처마 풍경 소리는 청보리밭 떠나고/ 지천명 사내 무릎처로 강바람만 차더라// 봄은 오고 지랄이야, 꽃비는 오고 지랄/ 십리 벗길 환장해도 떠날 것들 떠나더라(…)”(<섬진강 박시인>에서)

방 안 오디오에서는 자신의 주제가가 흐르는데, 시인은 오늘도 마당에 나가 꽃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화단에는 복수초 노란 꽃과 연분홍 노루귀가 피었고, 꽃대가 올라온 깽깽이풀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개울가 청매화 꽃망울에 맺힌 빗방울들이 인드라망의 구슬 같다고 느끼는 순간, 엊그제 다녀간 소녀가 방명록에 남긴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활짝 핀 꽃들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활짝 피기 전의 꽃이 이리 예쁜 줄 몰랐어요. 지금 내가 가장 예쁘다는 걸 몰랐네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영상은 <한겨레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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