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정 시인이 꾸리는 임프린트 ‘난다’는 앞에 붙는 말에 따라 ‘신난다’ ‘탐난다’ ‘샘난다’ 등 여러 의미로 확장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렇지만 ‘열난다’는 사양.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⑭ 시인 김민정의 편집 사무실
일산 신도시에서 임진각 방향으로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파주출판도시’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출판사와 인쇄소 등 출판 관련 업체들이 몰려 있는 한국 출판의 메카다. 굴지의 문학 전문 출판사인 문학동네도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4층짜리 문학동네 건물 2층에 시인 김민정의 편집 사무실이 있다. 김민정은 문학동네 출판사의 국내3팀 팀장이자 임프린트 ‘난다’의 대표를 겸하고 있다. 임프린트란 대형 출판사가 중견 편집자를 스카우트해 별도의 브랜드를 내주고 편집, 기획, 제작, 홍보 등 운영을 모두 맡기는 방식을 말한다.
김민정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재학하고 있던 1998년, 지금은 없어진 <베스트셀러>라는 잡지 기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베스트셀러>의 편집장은 대학 선배였던 소설가 박민규. 그때는 아직 등단하기 전이었다. 취직 이듬해 <검은 나나의 꿈>을 비롯한 시들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시인의 이름을 얻었는데, 등단작은 대학 3학년 때 과제로 제출했던 작품이었다.
“나는 유체 이탈하여 천장에 붙어 있다 이럴 때마다/ 내 몸에서 얇은 막 하나 하나가 양파 표피세포처럼/ 핀셋으로 집혀 나가고 건조한 살비듬만이 남아/ 내 발가락을 지탱한다 가렵다 가려워 긁을수록/ 노래하고 싶어진다 목이 마르다/ 주위에 아무도 없나 새벽 세 시지만 가끔/ 미친 척하고 달려주는 열차가 있다”(<검은 나나의 꿈> 첫 연)
미래파를 묶고 스스로 미래파가 되다대학원 입학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중도작파했다. 몇 군데 패션잡지사를 거쳐 2004년 출판사 랜덤하우스중앙에 취직해 전통의 문학지 <문예중앙>을 만드는 한편 ‘문예중앙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집 시리즈를 출범시킨다. 최하림 시인의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를 무녀리 삼아 나온 이 시리즈는 머지않아 ‘미래파’라는 이름 아래 한데 묶이게 될 황병승, 유형진 같은 난해하고 도발적인 젊은 시인들의 온상 구실을 했다. 김민정 자신은 2005년 5월 열림원 출판사에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첫 시집을 냈으며, 자신이 편집해 낸 시집의 주인들과 함께 미래파로 불리게 된다. 나중에 랜덤하우스코리아로 이름이 바뀐 이곳에 2008년 8월까지 있으면서 그는 시집 44권과 베스트셀러 여행서인 이병률 시인의 <끌림>을 비롯해 150권 가까운 책을 낸다. 영업 성과를 중시하는 풍토였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지병인 갑상샘기능저하증이 발병한 게 그 시절이었다. 랜덤하우스중앙을 그만둔 뒤 반년 정도 일을 쉬며 진로를 모색하던 그는 2009년 1월 문학동네에 입사했으며, 지난해 7월 ‘난다’ 임프린트를 출범시켰다. 문학동네에 와서도 그는 ‘문학동네 시인선’을 새롭게 시작해 지금까지 모두 16종을 냈고, 소설과 산문집, 그리고 통권 9권을 끝으로 접은 청소년 문학지 <풋>을 포함해 모두 50여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사이에 두 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2009. 12)가 나왔다. 약술한 이력에서 보듯 김민정의 삶은 시인과 편집자로 양분되어 있다. 그 두 개의 삶은 얼핏 긴밀하게 깍지 끼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정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가령 선이 굵고 시원하게 생긴 외모로 필자들과 씩씩하게 책 이야기를 나누는 편집자 김민정과 그의 시집에 흘러넘치는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사이에는 자금성의 해자보다 더 난해한 간극이 파여 있는 것만 같다. “지하에 계신 淫父(음부)와 淫母(음모)가 침봉으로 내 얼굴에 난 털을 빗긴다 나는야 털북숭이 라푼젤, 짜다 푼 목도리의 털실같이 꼬불꼬불한 털을 발끝까지 내려뜨린 채 울고 있다 울음을 짜보지만 눈물은 흐르자마자 냄새나게 덩어리지는 冷(냉)일 뿐, 에이 더러운 년 킁킁거리며 내 얼굴을 냄새 맡던 淫父가 빨간 포대기같이 늘어진 혀로 내 털 한 가닥 한 가닥을 싸매 핥는다 조스바를 빨던 입처럼 淫父의 혀 끝에서 검은 색소가 뚝뚝 떨어진다 이제부터 이게 네 머리칼이야, 알았어? 淫母가 스트레이트용 파마약을 이제부터 내 머리칼인 털 한 가닥 한 가닥에 찍어 바르더니 참빗으로 쭉쭉 펴 내린다 물미역같이 홀보들해진 머리칼을 부르카처럼 드리운 채 나는 淫父와 淫母의 손을 잡고 시장으로 끌려간다”(<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부분) 이 시를 표제로 삼은 첫 시집이 나왔을 때 문단 안팎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젊은 시인들의 독창적인 상상력과 과감한 실험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이 시들에서 시인의 어두운 가족사와 성장기의 육체적·심리적 상흔을 찾으려는 ‘엉뚱한’ 독자들도 적지 않았다. 딸의 등단과 시집 출간을 제 일처럼 기뻐하던 부모님도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는 힘들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시집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을 놓고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일기 형식에 담은 아래 글에서 그런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
김민정 시인의 손때가 묻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놓인 책상 위에서 연필을 쥔 그의 손이 교정을 보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
원하는 표지를 만들고
따끈따끈한 책을 손에 쥐고
남의 책이 잘되면 더 행복하죠 편집자 김민정은 씩씩한데
시인 김민정은 우울해요
스트레스도 잘 풀지 못하죠
시는 정신적 땀구멍이랄까 야한 김민정? “그만 씨불대고 너나 잘하세요”
“2005년 5월 25일의 詩(시), 나는야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왜 우리 딸이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야? 꼼꼼히 한번 읽어봐. 말 잘 듣는 아빠는 밑줄을 쫙쫙 그어가며 내 시집 읽기에 몰입했다. 뭔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무진 웃겨, 근데 이거 시 맞아? 재밌으면 그걸로 말씀 끝이야. 하지만 지인들에게 시집 돌리기 재미에 푹 빠졌던 아빠는 얼마 안 가 밤낮으로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걔네들이 뭐라 막 그래. 날더러 집에서 애들은 왜 그리 개 패듯 패냐, 민정이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냐, 남자 경험도 많은 것 같은데 얼른 시집이나 보내지 그러냐, 근데 이거 다 사실이냐…. 그래서 뭐랬는데? 개새끼들, 시도 좆도 모르는 것들이. 히히 잘 했는데 담부터는 이렇게 말해, 그만 씨불대고 너나 잘하세요!”(<詩, 雜(잡)이라는 이름의 폴더> 부분) 자신의 시집을 두고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짐짓 쾌활하게 옮겨 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민정의 시들이 근거 없고 자유로운 상상력의 소산만은 아니다. 낮의 편집자 김민정과 달리 밤의 시인 김민정에게는 어둠과 상처의 세계가 엄연한 현실이다. “해가 있거나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밝고 긍정적인데, 밤에 혼자 누워 있으면 예민지수가 강해지고 어두운 상태가 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느껴요. 혈액형이 에이(A)형인데다 네 자매의 장녀라서인지 내 안의 스트레스를 밖으로 풀지 못하는 편이에요. ‘정신적 땀구멍’이 없는 셈이죠. 그런 걸 표출할 수 있는 통로가 저에게는 시예요.” 그렇다면 김민정의 그로테스크한 시는 일종의 자기치유의 방편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편집자 김민정’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끝과 끊을 헷갈리지 않게 되자 끗을 만난다/ 끝이 끊어지는 것이듯 잘린 머리카락일 때/ 끗은 끈이듯 비명을 이어 붙인 동아줄이라/ 시방 겨오르고 있는 나 말고의 호랑이들로/ 울리는 모든 종소리는 그렇게도 불이다”(<끝이라는 이름의 끗> 부분) 인용한 시는 두 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에 실린 작품이다. 헷갈리는 표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편집자의 일상을 짐작하게 한다. 첫 시집이 준 강렬한 인상 때문에 두 번째 시집 제목은 오르가슴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실제로 읽어 보면 오르가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 화자는 천안역에서 연착하는 막차를 기다리다가 플랫폼 위에서 발톱을 깎고 있는 노숙자를 발견한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인 노숙자는 화자에게 커피 한 잔 마실 돈을 요구하고 화자는 육백 원짜리 캔커피 하나를 뽑아다 주는데, 노숙자가 원하는 것은 종이컵에 담겨 나오는 달달한 밀크 커피. 다시 삼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다 그 앞에 놓아 두는 순간 화자의 눈에 전광판을 흘러가는 안내 문구가 들어온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다급하게 펜을 찾아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그의 손에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지고, 시는 이렇게 끝난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오탈자와의 싸움을 숙명으로 삼는 편집자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삽화라 하겠는데, 시의 핵심은 정작 따로 있다.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노숙자의 헐벗은 추위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의 구체성과 타자와의 연대의식이 바로 그 핵심이다. 시인이 ‘느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 시집에서는 이렇게 타인의 삶을 향해 열린 작품들을 여럿 볼 수 있다. 세 번째 시집 제목은 단골 인쇄소 간판
“첫 시집이 저 자신을 향한 질문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너는 누구니?’라고 타인을 향해 묻게 된 셈입니다. 날던 시에서 걷는 시로, 꿈꾸기와 환상에서 대화와 섞임으로 바뀌었달까요. 사실 첫 시집의 시들은 마감에 쫓겨 억지로 ‘만든’ 시들도 없지 않았어요. 다른 시인들의 시집을 만들면서 새삼스럽게 ‘시가 과연 무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본 결과가 두 번째 시집이었어요.” 그러니까 편집자로서 동료 시인들의 시집을 만드는 일이 그의 시쓰기에 긍정적인 작용을 미쳤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에 관한 생각의 변화 때문이든 아니면 편집자로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일상 때문이든 그의 시작(詩作)은 지금 주춤한 상태다. 2010년 1월에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쓰고 나서 아직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것. 그럼에도 그다지 초조해하지는 않는다. 일종의 숨 고르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지 못하는 대신 그는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산문을 쓰는 것으로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풀고 있다.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동시집도 낼 예정이다. 김민정은 출판도시에서 멀지 않은 일산에서 자취하면서 택시로 출퇴근한다. 자동차는 물론 운전면허도 없다. 출근하면 커피 타임을 겸한 팀 회의를 이끌고, 전자우편을 주고받으며, 수시로 전화를 건다. 업무의 3분의 1이 전화 통화다. 실제 교정 업무는 팀원들이 주로 보지만, 그 역시 교정지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다. 제목을 짓고 부를 나누며 표지 콘셉트를 잡기 위해서다. 표지 디자인에 쓸 그림이나 사진을 고르기 위해 화가나 사진가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글을 쓰는 사람임에도 보도자료를 쓰는 일을 가장 어려워한다. 홍보는 워낙 마케팅 부서 소관이지만, 김민정은 마케터와 의논해서 홍보 이벤트의 프로그램을 짜고 배우나 가수 등 초대 손님에게는 직접 연락을 취한다. 상수동 이리 카페나 홍대 앞 주차장 거리 카페 꼼마에서 여는 신간 시집 낭독회 ‘문학동네 시랑사랑’, 또는 2010년 4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마련했던 박범신 소설 <은교> 입체 낭독회 같은 것들이 모두 김민정의 머리와 손끝에서 나온 행사들이다. “원고를 읽으면서 연필을 들고 제목을 궁리할 때, 표지가 원하는 대로 나왔을 때, 막 인쇄돼서 뜨거운 상태의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정말 행복해요. 제 시집이 잘되는 것보다 내가 만든 책이 잘돼서 뒤에서 박수 치는 게 더 좋으니 ‘천상 편집자’ 아닌가요. 호호. 백발에 돋보기 안경을 쓴 ‘할머니 편집자’로 남는 게 꿈이랍니다.” 두 번째 시집 이후 시를 거의 쓰지 못했지만, 세 번째 시집 제목은 벌써 정해 두었다. ‘영신사’다. 영신사는 파주출판도시에 있는 인쇄소로 그가 자주 출입하는 곳이다. “인쇄소에 가면 온갖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죠. 입고된 종이를 지게차로 나르고, 종이를 세고, 잉크를 섞고, 기계를 닦고, 필름을 출력하고, 종이가 마르면 접고, 책을 제본하고, 마지막으로 끈으로 묶어서 출판사에 입고하는 일까지. 그 사이사이에 간식으로 빵을 먹는 이들도 있구요. 인쇄소에는 땀 흘리는 삶이 있어서 좋아요.” 편집자 김민정과 시인 김민정이 만나는 교차로에 인쇄소 영신사가 있다. 선임기자 bong@hani.co.kr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