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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04 19:30 수정 : 2012.05.05 15:14

박범신의 논산 집필실 뒤꼍은 널따란 천연암반과 그 아래의 작은 연못이 운치를 더한다. “퍼질러 앉아 소주 한잔 하기 딱 좋다”는 그 바위 위에서 작가가 우산을 쓰고 포즈를 취했다. 논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⑮ 소설가 박범신의 논산 집

2011년 7월1일 저녁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는 박범신의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말굽>)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작가들이 책을 내면 어떤 식으로든 출판 기념 모임을 마련하고, 이따금씩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이나 한국언론회관 같은 큰 공간이 그 무대가 되기도 하는 터. 그날 모임이 새삼스럽거나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인공인 작가 박범신에게 그 자리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1973년에 등단해 작가 생활 39년째를 맞은 그에게 <말굽>이 서른아홉번째 장편이라는 숫자의 우연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날 행사는 단순히 책 한 권의 출간을 축하하는 것을 넘어 박범신의 작가 생활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법했다. 문단 안팎의 친지와 가족, 제자 등으로 성황을 이룬 그 자리에서 박범신은 ‘중대 발표’를 했다. 그해 여름으로 예정된 대학(명지대 문예창작과) 정년퇴직에 맞추어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연희문학촌장이라는 ‘감투’ 역시 벗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달 안에 막내아들도 결혼을 해서 독립하는 만큼 이제 자신은 교수와 가장이라는 두 개의 짐을 내려놓고 남은 시간을 온전히 작가로서 살아 보겠노라고 그는 설명했다. “‘선생 노릇’과 ‘아버지 노릇’을 핑계로 모든 일에서 ‘차선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때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회한과 함께 비장한 결의가 내비쳤다. 완주한 마라토너라기보다는 오히려 출발선에 웅크린 단거리 육상선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박범신은 “‘금강’이라는 가제로 금강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강에 의지해 살고 망하고 떠났는가를 그리는 소설을 필생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50년 만의 귀향, 이층집에 마음이 끌리다
그로부터 다섯 달 가까이 지난 11월27일 그는 작가로서 ‘최선의 길’을 향한 첫걸음을 떼었다. 1988년부터 사반세기 가까이 살아온 서울 평창동 집을 뒤로하고 고향 논산으로 내려간 것이다. 1963년 이리(지금의 익산) 남성고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난 때로부터 근 50년 만의 귀향이었다.

“아아, 금강./ 산정에 오르면 곧잘 그는 중얼거린다./ 백제의 고도 공주 부여를 지나 온 황톳물이 성동벌판의 북쪽 끝을 돌아와 ㄹ자(字)로 휘돌며 강경포구를 쓰다듬고 흐른다. (…) 강과 벌판은 너무도 잘 어울린다. 북쪽으로 쑥 물러나 성동벌판을 싸안듯이 둘러쳐나가 멀리, 운무 속에서 계룡산과 합류하고 있는 산들의 연접도 보기 좋다. 그가 태어나서 중학교 이학년 때까지 살던 두화마을은 성동벌판의 남쪽 끝에 있다.”

인용한 부분은 그의 자전적 소설 <더러운 책상> 중 고향의 지형을 묘사한 대목인데, 박범신이 소설에 묘사된 바로 그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고향인 충남 논산시 연무읍 봉동리는 본래 전북 익산에 속해 있었으나 논산훈련소가 생기면서 충남에 편입된 곳. 그가 새롭게 정착한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는 탑정호라는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호숫가 마을이다. 마을이라고는 해도 근처에 인가가 많지는 않고, 여행객을 겨냥한 식당과 숙박시설 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한적하고 운치있는 곳이다.

“작년 여름 모든 사회적 타이틀을 내려놓고 새 출발을 위한 모종의 변화가 필요하다 싶었을 때 논산이 다가왔어요. 저는 사실 고향이 싫어서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논산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지요. 서울을 뜨더라도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러 우연이 겹치면서 결국 논산으로 오게 됐네요.”

퇴역 교장 선생님이 지어서 살았다는 이 이층집이 작가의 마음을 끈 것은 크게 두 가지. 대문에서 마당에 이르는 진입로의 비스듬한 경사, 그리고 집 뒤꼍의 너른 암반과 그 아래 작은 연못이었다. “처음부터 언젠가 와 본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어요. 입구의 야트막한 경사는 저의 오랜 로망이었고, 뒤꼍의 바위는 앉아서 소주 한잔 하기 딱 좋아 보이더군요.”

그러나 서울을 뜨기 싫다며 뒤에 남은 부인의 배웅을 받으면서 평창동 집을 나설 때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유배를 가는 기분”이었다고 그는 2011년 11월27일치 페이스북 일기에 썼다. ‘나는 대체 왜 이 길을 가려고 하는가.’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듯 떠나온 길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 논산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뜻밖에도 ‘귀신’들이었다.

“낮에는 집 앞 호수와 그 너머 산들을 보거나 차를 몰고 논산 전역의 골목골목을 둘러보는 일로 소일할 수가 있어요. 문제는 밤이죠. 천지 사방이 깜깜한 가운데 집 안에 홀로 웅크려 있자니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우선은 책을 읽으면서 버텨 보지만, 밤 열 시쯤 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주를 아주 빠른 속도로 마시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취기가 돌면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고 헛것이 보이기도 해요. 결국은 그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지경까지 가는 거죠.”

논산 집에서 그가 만난 귀신들은 모두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라고 그는 말했다.

“호수가 끝나는 안쪽이 계백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황산벌이에요. 미륵세상을 꿈꾸었던 견훤을 무너뜨리고서 왕건이 세운 절 개태사가 그 인근이구요. 동학의 남북 접주들이 모여 우금치 전투를 준비하던 곳도 근처입니다. 금강 유역이란 대대로 패배의 역사가 짙은 곳이죠. 5천 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었을까요. 뗏장 밑의 억울한 영혼들이 저를 매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저를 이곳으로 부른 것만 같아요. 서울에 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죠.”

작가 40년차, 다시 새출발
혈혈단신 이삿짐을 쌌다

한밤 외로워서 술에 취하면
고향 못 간 영혼들이 찾아온다
제 얘길 들어달라, 써달라고…

‘영원한 청년 작가’의 페이스북 일기
그는 또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태두 격인 사계 김장생으로 대표되는 유구한 유학적 전통 역시 그가 발견한 고향 논산의 새롭고 중요한 면모라고 강조했다.

“흔히들 논산 하면 육군훈련소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논산은 사실 매우 유서깊은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고장입니다. 율곡 이이의 법통을 이은 게 김장생이고,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바로 사계의 제자입니다. 그 송시열의 제자 격임에도 주자학에 반기를 든 개혁적 지식인 윤휴에게 우호적이었던 윤증의 고택 역시 논산에 있습니다. 소론의 태두로 불리는 윤증이라는 관찰자의 눈으로 보수의 거두 송시열과 진보의 거두 윤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소설도 쓰고 싶어요.”

수구초심이랬다고, 나이 든 작가가 고향으로 내려가면 대체로 자연과 벗하는 가운데 차분하게 삶을 정리하는 말년을 상상하기 쉽지만 ‘영원한 청년 작가’를 자처하는 박범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유유자적과 안빈낙도는 가라! 나는 작가로서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 여기 왔다.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인간이 온 것이다!’ 예순을 훌쩍 지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안에 도사린 채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는 어느 불온한 청년이 그의 귀에 대고 외쳐 대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내려간 고향에서 그는 그러나 아직 새 소설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소설 <말굽>을 탈고한 때로부터 치자면 1년 반 동안 ‘작가 휴업’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90년대 초중반의 ‘절필’ 기간을 포함해 작가 생활 39년 동안 중단편집을 제하고 장편만도 39편을 낸 작가치고는 썩 이례적인 일이다. <은교>에서 <비즈니스>를 거쳐 <말굽>까지 세 장편을 1년 반 동안 몰아서 썼던 그 아닌가. “소설을 안 쓰는 게 더 힘들다”던 그가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는 게 걱정스럽다기보다는 그 배경이 궁금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해서 내려오긴 했는데, 그 방향이 어디일지에 대해 아직 확신이 서질 않네요. 1993년 절필 선언을 하고 96년에 <흰소가 끄는 수레>로 복귀한 뒤부터 <말굽>까지는 말하자면 초월을 향한 갈망에 끄달렸던 시기라 할 수 있지요. 지금은 그 갈망의 시기가 끝나고 내 문학 인생의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는 지점인데, 그게 어떤 것일지 저부터가 촉수를 내밀고 기다리고 있는 셈이에요. 그렇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대신 그는 페이스북에 적은 일기를 책으로 묶어 냈다.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제목의 이 책은 그가 논산에 내려간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휴대전화의 자판을 오른손 검지로 꾹꾹 눌러쓴 일기 모음이다. 페이스북 일기는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서울의 분주와 번잡이 싫어 논산으로 내려갔지만 동시에 사람들에 대한 여전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는 그다. 스스로도 “혼자이고 싶은 강력한 욕망과 혼자이지 못하고 사람들 속에 섞이려는 강력한 욕망 사이에서 평생 갈팡질팡해 왔다”고 표현할 정도다. 정년퇴직을 끝으로 손을 떼려 했던 강의를 재개한 것도 그런 주저와 변덕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금 상명대 석좌교수로서 금요일에 두 시간 강의하고, 논산의 건양대에서도 화요일에 강의를 맡고 있다. 목요일 저녁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일요일에 논산으로 내려오는 생활 리듬도 강의 일정에 맞춘 것이다. 하고 보니 두 개의 강의 일정이 너무 부담스러워 2학기에는 둘 중 하나를 줄일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젊은 문학도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작가로서 그에게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문학과 나, 문단과 나의 불화에 대하여
“지금 생각해 보니 젊은 문학도를 질책하던 말이 나한테도 경계심을 주었던 것 같아요. 학생을 꾸짖다 보면 그 학생 옆에 나도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학생에게 돌아가는 꾸지람을 끊임없이 저 자신에게도 들이밀어 보는 거죠. 그런 게 작가에게는 생산적 에너지가 되었던 것 같아요.”

난방을 위한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논산 집에 본격 입주한 것이 3월 하순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에 찾아간 그 집에는 마무리 조경 공사가 한창이었다. 잘생긴 배롱나무가 마당 한켠에 들어섰고, 소나무나 자작나무 몇 그루도 옮겨 심을 계획이라고 했다. 2층짜리 건물의 2층은 서재와 집필실 등으로 꾸며졌고, 1층에는 거실과 침실, 손님방 등이 들어섰다. 거실에는 소파를 두지 않은 대신 원목을 길게 잘라 만든 다탁 둘과 등받이 달린 앉은뱅이 의자 몇이 놓여 있다. 나무로 마감한 벽과 다탁에는 작가가 낙서 삼아 그린 그림과 글씨도 보인다. 그가 좋아하는 산과 나무와 소녀, 그리고 빈 의자였다. 흥이 나거나 술에 취하면 붓을 잡는다는 그는 “머잖아 거실이 낙서로 다 채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 생활 40년이 연애 한번 한 것처럼 지나갔네요. 돌이켜 보면 수지 맞는 장사를 한 거죠. 문학을 한 덕에 당대인들한테서 최소한 사랑은 얻었잖아요? 워낙이 예민한 성격이라서 내부는 늘 위태로운 경계를 걷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큰 탈 없이 평온한 삶을 살아왔으니 이만하면 행복하다 말해도 되겠죠?”

박범신은 80년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최근에는, 비록 영화 덕을 보긴 했지만, <은교>가 다시 종합 베스트셀러 수위를 다투고 있다. 많은 독자에게 읽힌다는 것은 작가로서 축복이라 하겠으되, 그에게는 그것이 상처이기도 했다. 세 아이의 아비이던 80년대에 안양천변에서 동맥을 그었던 일, 그리고 93년의 절필 선언이 그 상처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평생 네 번 자살 기도를 했어요. <더러운 책상>이 10대의 자살 미수를 다룬 소설이라면, 20대에서 30대에 걸친 두 번의 자살 미수는 속편을 위해 남겨두었어요. 죽기 전에는 속편을 꼭 쓸 생각이에요. 문학과 나, 문단과 나의 불화가 거기 담기겠죠. 80년대에 내가 동지라고 부르고 싶었던 이들이 나를 상업작가라며 공격하는 게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자 슬픔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런 게 나한테는 문학적으로 부패하지 않고 오래 살아남게 한 동인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전(前)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항시적 공포’를 토로하는 그는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젊어 보였다. 탑정호가 내려다보이는 새집은 박범신 문학의 논산 시대를 일구는 자궁으로 구실할 터였다. 아직 확실한 방향을 잡지는 못했다는 작가는 우선 이미지를 위주로 한 수필 같은 연애소설로 손을 풀어 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선임기자 bong@hani.co.kr, 영상은 <한겨레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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