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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9 19:30 수정 : 2012.07.02 12:40

원고지에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글을 쓰는 작가 김훈을 사진에 담기 위해 아날로그 대형 필름카메라를 사용했다. 전면에는 ‘자전거 레이서’를 자처하는 그의 애마 ‘풍륜’(風輪) 5호가 누워 있다.(위스타 4×5인치 카메라, 렌즈 65㎜ f8, 필름감도 ISO100 사용). 고양/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19) 소설가 김훈의 일산 작업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소설가 김훈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기념품’이 있다. 몽당연필이다. 그의 방 책상 위에는 한의사였던 조부가 쓰던 오래된 저울 하나가 매달려 있는데, 지금은 약재 대신 몽당연필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작가가 너무 짧아져서 손에 쥐기 힘든 연필들을 저울에 올려 놓곤 하는 것이다. 연필은 물론 원고지를 사용하는 작가도 만나기 힘들어진 시대에 작가의 손때가 묻은 몽당연필이 인기 수집품 목록에 오른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2012년 6월 하순에 찾아간 김훈의 작업실 저울 위에서 몽당연필을 볼 수는 없었다. 따지듯 까닭을 묻자 “원고를 쓰지 않아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2011년 11월에 내놓은 소설 <흑산> 이후 김훈은 아직 새 작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냥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없는 몽당연필 대신 그의 작업실에서 6·25 전쟁기의 신문 복사철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조사보고서 수십 권을 만난 것이 서운하지는 않았다. 서운하기는커녕 반갑고 설레기까지 했다. 그것들이 지금 김훈의 머릿속에서 신작소설로 탈바꿈하기 위한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1950년 말에서 51년 초 부산 피난 시절의 <부산일보>와 같은 기간의 <조선일보>를 살펴보고 있어요. 당시 나도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기차 지붕에 앉은 채 8박9일이 걸려서 간 거예요. 많은 이들이 떨어져 죽거나 얼어 죽거나 터널 속 철근콘크리트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지요. 부산에 도착해서는 감기에 걸려 허무하게 죽기도 하고. 다행히 나는 안 죽고 이렇게 살아 있는 거지요.”

기차 지붕에서 보낸 8박9일과 고관대작들

책상 위에 펼쳐진 60여년 전 신문을 뒤적이던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시 열차 객실엔 고관대작들이 피아노에 장롱에 요강과 셰퍼드까지 싣고 갔다고 해요. 아버지한테 그런 말을 들었는데, 믿기 어려워서 부산일보를 봤더니 그 말이 진짜더군요. 기사에 나온 건 기차가 아니라 도로 쪽 얘기여서, 관용트럭이 피아노며 장롱을 싣고 가는 행태에 대해 경고하는 계엄사의 성명이 있었어요. 그걸 보니 기차도 대동소이했겠다 싶어요.”

가까스로 올라탄 기차 지붕 위에서 개 같은 죽음을 맞는 백성들과 알량한 권력을 열차 객실이며 관용트럭에까지 옮겨 온 고관대작들의 대비는 그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대장장이 서날쇠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수령과 군사들을 지켜보며 곱씹던 상념을 떠오르게 한다. “…저것들이 겉보리 한 섬 지니지 않았구나.” 겉보리 한 섬으로 상징되는 생존과 일상에 충실한 리얼리스트 서날쇠, 그리고 실속 없는 명분과 권력을 붙좇는 관료들의 대비가 피난길 기차 지붕과 객실에서 재현되었던 셈이랄까.

“아버지는 일제 초기에 태어나서 식민 지배와 전쟁, 박정희 시대까지를 다 겪었어요. 한생에 그렇게 심하게 당하기도 쉽지 않겠죠. 그 혹독한 시대를 지나 오면서 어떻게 안 돌아가시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예요.”

그의 부친 김광주(1910~1973)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을 모시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이로, <경향신문> 문화부장과 편집부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정협지> <비호> 같은 무협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했다. 말년에 병석에 누워 있던 부친이 고등학생 김훈에게 소설 원고를 받아쓰게 했고,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구두점을 찍고 줄을 바꾸는 과정이 김훈의 문장 수업이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훈이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결국 작가가 된 경로에는 부친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전쟁기의 신문이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짐작하게 한다면,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는 김훈 자신의 세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 대상으로 삼은 이 보고서에 주로 등장하는 시기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이기 때문이다. 김훈은 6개월 전부터 이 보고서를 읽어 오고 있는데, “내가 태어나 살아온 시대의 야만성을 돌이켜 보는 작업”이라고 그는 보고서 읽기의 의미를 요약했다. “고통스럽고 무겁고 슬픈 작업이지만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보고서 읽는 일이 그에게 한층 고통스러운 것은 거기 취합된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그가 그것들을 기록할 의무를 짊어진 기자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삼청교육대를 찬양하는 기사를 우리가 썼습니다. 삼청교육대란 게 새사람 만드는 과정이라며 현지 르포 기사를 그럴듯하게 썼어요. 내가 직접 쓴 건 아니고 내 동료들이 썼지만, 그 구조에서 나만 현장에 안 갔다고 해서 알리바이가 성립하는 건 아니에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당사자인 우리 세대가 스스로 나서서 말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우리더러 말을 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도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김훈은 누구도 다그치지 않는 자기 시대의 치부를 소설 형식을 빌려서 까발릴 궁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자로서 쓰지 못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의 소설로 빚어져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증이 일었다.

김훈이 처음부터 기자나 작가의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다. 휘문고 시절의 그는 모범생도 아니었고 문예반도 아니었다. 툭하면 학생들을 때리는 학교가 싫었고, 군가나 교가 따위나 가르치는 음악 시간이 가소로웠다. 송창식과 폴 앵카를 들을 수 있고 예쁜 여학생들도 만날 수 있는 세시봉이 좋았다.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며 교실에서 쫓겨난 친구를 따라 나가 술을 마시며 놀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의 꿈은 단 하나, 밥을 먹겠다는 것이었다.

‘육하 너머’ 진실을 향한 갈망

“아버지는 나더러 육군사관학교에 가라고 했지만, 나는 내키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문학을 향한 꿈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시집을 끼고 다니는 친구들을 경멸했지요. 당시는 아직 전쟁이 남긴 폐허가 복구되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해마다 절량농가가 나왔지요. 겨우 흑백텔레비전이 있었고 냉장고는 아직 보급되지 않았을 때예요. 나는, 다른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를 밥을 먹는 나라로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졸업하면 재벌회사에 들어가서 생산 담당 이사가 되어 좋은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만들어 공급하고 나도 잘살고 싶었어요.”

1966년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한 김훈은 2학년 때 우연히 영국 낭만주의 시를 접하고는 그에 빠져들었다. 비슷한 무렵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3학년 때 영문과 2학년으로 편입했지만,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그의 대학 시절은 마감되었다. 1973년 제대 직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일보사에 수습기자로 입사한다. 역시 밥을 벌기 위해서였고, 그 신문사가 유일하게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훈이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 1974년, 박정희는 긴급조치라는 초법적 통치 수단으로 민주주의의 숨통을 한껏 죄어 왔다. 김훈 기자의 앞날이 순탄할 리 없었다. 광주 시민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 치하의 80년대는 제대로 된 기자 노릇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보안사니 경찰이니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기관원들이 편집국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며 기사 문구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었다. 고문으로 팔다리가 비틀린 채 쓰러져 있는 대학생들 이야기는 기사로 쓸 수가 없었다. 대신 동물원의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거나 낙타가 교미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사회면 머리를 장식했다. 육하원칙에 맞추어 써야 한다는 사건 기사의 제약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의 진실은 육하 너머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회부 기자 10년을 끝내고 문화부로 옮겨 가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종교를 비롯해 문화부 안의 여러 분야를 맡아 기사를 쓰던 김훈은 곧 문학 담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학 담당 5년 동안 그가 쓴 기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후배 기자 박래부와 함께 작업한 연재물 ‘문학기행’이었다. 매주 신문 한 면씩, 2년여에 걸쳐 이어 나간 이 기획은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았고, 김훈 기자의 책상 위에는 문학소녀들이 보낸 편지와 꽃, 과자 따위가 쌓였다.

육하원칙의 제약이 상대적으로 심한 사건 기사에 비해 문학 기사는 한결 자유롭고 편안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내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었다. 1989년 12월31일로 그는 한국일보사를 그만두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더러운 80년대”와 작별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5월 광주의 피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80년 8월 하순에 전두환 장군을 찬양하는 기획 기사를 썼던 그였다.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을 때의 각오가 무색하게 1년 뒤 “쌀이 떨어지자” 그는 다시 언론사에 들어갔고, 그 뒤로는 이 신문 저 잡지를 들락거리며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왜 몽당연필이 없냐고?
안 썼으니까
대신 부산 피난시절 신문들과
진실화해위 보고서 수십권을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필일신’(必日新)이 적힌 칠판은
원고집필 시작과 함께
‘필일오’(必日五)로 바뀐다.
하루 원고지 다섯장은 쓸 것!
여기선 못 쓴다, 유흥가 때문에…

독수리타법, 이건 선비가 할 짓이 아니야

그러나 신문사를 그만둔 유랑의 시절에 미술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산문집 <풍경과 상처>, 그리고 1994~5년에 걸쳐 신생 문예지 <문학동네>에 분재한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등을 통해 그는 ‘나만의 글’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첫 소설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의 만연체 문장은 ‘육하 너머로’ 가고 싶어했던 기자 김훈의 갈망에서 빚어져 나온 것으로, <칼의 노래>(2001) 이후 작가 김훈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장들과는 확연한 거리가 있다. 어찌 보면 기자 김훈의 문장과 작가 김훈의 문장이 뒤바뀌었다는 느낌조차 주는데, 작가 자신은 “글쓰기를 문과대학에서가 아니라 무인한테 배웠다”는 말로 <난중일기>가 자신에게 준 충격과 가르침을 요약하곤 한다. 그는 “좋은 글이란 화려하거나 멋들어진 문장이 아니라 사실과 정보를 논리적으로 배치한 글”이라며 “김훈의 ‘문학기행’은 잘 쓴 글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

<난중일기>와 <무예도보통지>에서 배운 ‘무인의 문장’을 그는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새기는데, <한겨레> 사건 기자로 마지막 언론사 근무를 했던 2002년 그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기사를 쓰고자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 삼렬횡대로 된 자판의 가운데 열에 있는 자모만으로 이루어진 ‘미나리’까지는 그런대로 수월했다. 그러나 아래 열이나 윗열에 있는 자모를 치기 위해 새끼손가락을 부자연스럽게 내뻗어야 하는 건 참기 힘들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이게 선비가 할 짓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달 남짓 해 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연필로 돌아갔다.

“‘선입자주’(先入者主)라는 말이 있어요. 먼저 들어온 놈이 주인 노릇 한다는 뜻이죠. 사람의 머리나 습관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는 연필에 먼저 익숙해졌기 때문에 연필이 내가 가야 할 길이 된 것이죠.”

그의 작업실 벽에는 자그마한 녹색 칠판 하나가 걸려 있고 그 칠판에는 ‘필일신’(必日新)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의 이 말에는 김훈의 자기 다짐이 담겨 있거니와, 그가 원고 집필에 들어가면 이 문구는 ‘필일오’(必日五)로 바뀐다. 하루에 반드시 원고지 다섯 장은 쓰자는 뜻이다. 그가 존경하는 안중근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 액자 옆에서 ‘필일신’ 칠판은 ‘필일오’로 바뀔 날을 기다리고 있는 셈인데, 그러나 작가는 “소설을 쓰자면 어디론가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오피스텔은 호수공원과 유흥가 사이에 있어서 환경이 어수선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을 탓할 수는 없고 내가 피하는 수밖에…”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술을 겸한 저녁을 해결할 곳을 찾아 환락가의 한가운데로 발을 들여놓았다.

최재봉 문화부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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