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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13 19:53 수정 : 2012.07.13 19:57

고향 거문도에 칩거한 채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 한창훈이 녹산등대 너머로 저무는 해를 배경으로 고향과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수/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20) 소설가 한창훈의 거문도

▶ 고향이란 대체로 애증의 양가감정을 낳게 마련이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증오와 회한도 생기는 법. 그러나 한창훈은 “어린 나이에 고향 거문도를 떠났기 때문에 고향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열 살 나이에 여수로 이사하기 전까지 친구들과 즐겁게 뛰놀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엑스포 바람은 거문도에까지 불어와 있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거문도에서 예전의 쇠락한 느낌을 맛보기란 쉽지 않았다. 전에 없던 높고 번듯한 건물들이 여럿 보였다. 항만에는 새 터미널 공사가 한창이었고,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섬은 인파로 북적였다. 승용차며 크고 작은 트럭들이 좁은 길을 분주하게 오갔다. 식당과 가게, 민박집 등의 간판이 모두 도심의 오피스텔 상가처럼 깔끔한 디자인으로 탈바꿈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엑스포 민박’이라는 이름도 보였다. 10년 전 처음 왔을 때에 비한다면 한결 활기차고 생동하는 느낌을 주었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문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소설가 한창훈 덕분이었다. 2003년 3월 그의 주선으로 동료 문인 20여명과 함께 거문도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던 것. 그로부터 10년 뒤의 두번째 거문도행 역시 한창훈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한창훈은 2006년부터 고향인 거문도에 들어와 혼자 살고 있다.

1999~2000년 이어 두번째 귀향

“어느 순간 나는 무한정의 적막과 맞대면을 해 버리기로 마음먹었고 고립을 찾아 저 먼 섬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버리고 고개 너머에서 홀로 살았다. 적막은 내 눈을 되돌려 스스로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게 변방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세상을 궁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보니 햇수로 두 해가 지나갔다.”

인용한 글은 그의 연작 소설집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2003)에 붙인 ‘작가의 말’의 일부다. 소설로 출간되기는 했어도 이 책은 한창훈이 1999년부터 2000년에 걸쳐 2년 가까이 거문도에 홀로 살던 무렵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에 가깝다. 그때의 심정과 2006년 두번째로 혼자서 거문도로 들어올 때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섬은 푸른 바다 한가운데 익사 모면할 정도의 몇 뼘 땅. 광활한 수평의 세상을 버티고 있는 수직의 장소. 방파제를 넘어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와 초속 삼십 미터의 강풍. 어부의 죽음, 가지가 한쪽으로만 늘어나 버린 팽나무. 단 한 뿌리라도 더 캐려다가 비탈에서 떨어져 버린 아낙, 살아남은 자들의 깊은 주름. 급경사의 밭. 끝없이 이어지는 일. 이젠 됐다 툭, 떨어지는 동백꽃.”

그가 어느 산문에서 인상주의풍으로 점묘한 섬의 특징적 면모들이다. 한창훈은 1963년 이곳 거문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열 살에 여수로 나갔다. 중학교까지 여수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는 광주로 진학했다. 거문도에서 여수로, 다시 광주로 점점 크고 번화한 동네로 근거지를 옮겨 갔던 셈인데, 80년 5월 광주학살을 전후로 한 고교 시절은 지난해에 나온 장편 <꽃의 나라>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교 졸업 뒤에는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삶을 택했다. 돈이 필요하면 농가에서든 벽돌공장에서든 닥치는 대로 품을 팔았다. 길을 가다가 건설 현장이 보이면 다가가서 ‘여기 사람 필요하지 않나?’ 묻는 삶이었다. 바닷가 음악 주점에서 디제이를 한 날들도 있었다.

그 사이 방위 근무까지 마치고 대학은 뒤늦게, 대전 한남대 지역개발학과 86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이마저도 그만두고 다시 여수의 수산물 가공 공장을 전전했다. 1998년 제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장편 <홍합>은 이 시절의 산물이다. 작가가 되자고 처음으로 마음먹은 것이 이 무렵, 어느 공장 골방에서였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직업을 선택해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궁리하다 보니 작가라는 게 떠오르더군요.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욕을 안 먹을 것 같고, 나의 자세를 훼손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또, 워낙이 태어나서 언어와 정서를 배운 섬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던 탓도 있어요. 아웃사이더의 삶과 풍경, 말을 소설로 기록해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니까 ‘소설가 한창훈’은 태생에서부터 숙명적으로 섬과 이어져 있는 셈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소설가가 되는지 도무지 아는 게 없었다는 것. 대학에 문예창작과라는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나마 학교에 가야 무언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대학에 복학해서는 ‘문학’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과목은 불문곡직하고 수강했다. 그러다가 글패를 만들려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드디어 동료 문학 지망생들과 합평회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한창훈 작가가 지난달 28일 오후 전남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자택 앞 창고를 개조해 만든 작은 도서관에 앉아 있다. 이정아 기자
섬에서도 외딴집
적막하고 적막한 유배생활
동네로 글감 취재를 나간다
그저 멍하니 앉아
사람들의 수다를 듣는 일

섬과 바다를 그렇게 쓰고도
아직 쓸 게 남았냐고요?
도시 작가들에겐
그런 질문은 하지 않잖아요

최고의 뉴스는 날씨, 그다음은 구급용 헬기

91년 여름에 졸업하고 이듬해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그러나 지역 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처지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신춘문예 당선 전과 마찬가지로 당선 뒤에도 생계는 노동으로 해결했다. 1994년께 명망 있는 중견 평론가가 신문 월평에서 그의 작품을 언급한 뒤부터 ‘중앙’의 비중 있는 문예지들에서 청탁이 오기 시작했다. 1993년 거처를 충남 서산으로 옮기고 결혼까지 한 뒤 만 5년을 서산에서 살았다. 비슷한 처지였던 시인 유용주와 아파트 아래위층에 살며 ‘환상의 콤비’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1996년에 첫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을 냈고, 1998년에는 두번째 소설집 <가던 새 본다>와 연작 장편 <홍합>을 잇따라 내놓았다. 그렇게 나름 잘나가던 그가 어느 날 문득 고향 거문도로 숨어든 거였다. 그것도 귀신 나온다는 소문이 있던 버려진 외딴집이었다.

“마을은 동그랗게 모여 서로 옆구리 비비며 긴밀함을 주고받고 있는데 이곳은 외따로 뚝 떨어져, 등대가 있는 섬과 끝 간 데 없는 바다만 보이는 곳이다. 파도를 울타리로 하고 바람을 손님으로 삼고 하늘을 지붕으로 삼는 곳. 그러나 나는 그게 맘에 들었다. 글쎄 나는 나를 유배시켜 놓으려고 이곳을 찾아들었던 것이다. 외로운 섬에, 그것도 귀신 나온다는 흉가에 스스로를 유배시켜 놓고 한세상 보내 보려고 한 거였다.”(<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에서)

10여년 전의 거처와는 다르지만, 지금 한창훈이 살고 있는 집 역시 마을에서 떨어져 있기는 매한가지다. 행정구역상 여수시 삼산면에 해당하는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고도 세 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도와 서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 고도가 면 소재지이자 여객선 터미널과 거문항이 있는 중심부. 고도와 서도는 차량이 오갈 수 있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도는 배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한창훈의 거처는 서도에 있는 유림해수욕장 옆 외딴집. 주변에 다른 인가는 없어서 해수욕장을 독차지하고 있는 모양새다. 유일한 동반자는 한 살 된 암컷 개 ‘이루’.

아침 여섯시쯤이면 눈이 뜨인다. 오전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쓰려 노력한다. 어쨌든 집에 붙어 있는 편이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낚시를 가거나 동네 마실을 나간다. 고도 중심부, 항만의 동네 슈퍼 앞 작은 평상이 그의 자리다. “거기 앉아 있으면 섬 돌아가는 게 다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때로는 슈퍼가 아니라 후배가 하는 식당 앞 파라솔 아래 앉아 있기도 하는데, 그가 지나다니는 동네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꾸로 그런 그를 구경한다. 이렇게 멍하니 앉아서 사람들을 지켜보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게 그에게는 엄연한 취재다.

“섬사람들은 만나면 일단 날씨 이야기부터 나눕니다. 컴퓨터를 켜도 기상청 사이트에 먼저 들어가죠. 날씨를 알아야 그날 스케줄이 정해지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날씨 다음으로 가장 큰 뉴스는 누가 아파서 구급용 헬기가 떴다더라, 또는 관광객들이 술 마시고 싸웠다더라 같은 겁니다. 슈퍼나 식당 앞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이가 합류해서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나누죠.”

심상한 척 그런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쓸모있어 보이는 이야기나 표현이 나오면 문자를 보내는 척하면서 휴대폰의 메모장에 기록한다. 그렇게 ‘수집’한 사연과 표현은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청춘가를 불러요> <나는 여기가 좋다> 같은 소설들과 <한창훈의 향연>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같은 산문들, <열여섯의 섬> <검은섬의 전설> 같은 어린이·청소년물 등에 착실히 갈무리되었다. 제목에서부터 거문도와 섬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 숱한 작업들에도 불구하고 한창훈은 여전히 이 섬에 쓸 거리가 많다고 말한다.

“아직도 섬과 바다에 대해 쓸 얘기가 남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도시에서 살며 도시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에게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잖아요? 작가들 전체를 놓고 보면 섬과 바다에 대해 쓰는 이는 아주 드뭅니다. 저라도 쓰지 않으면 그나마도 아예 없어질지도 몰라요.”

방 한칸은 도서관으로…작가 레지던시도 구상

한창훈은 한국 문학의 전체 지형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그가 고독과 소외를 감수하면서까지 고향 거문도로 들어온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2009년에 낸 산문집 <한창훈의 향연>에는 그런 그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실려 있다.

“가난과 외곽을 그리는 소설은 의미를 잃은 시대에 나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대중 속의 고독도 사람의 일이라 작가가 그곳으로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너무 많이들 어두운 카페로 걸어들어가 버렸다. 개인의 우울이 사회의 비참보다 더 크고 강렬해져 버린 것. 이른바 문학적이다. 그러나,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같은 책에서 그는 “사람과 함께 태어나 함께 살다가 함께 스러져 간 변방의 말과 노래”에 대한 애정과 모종의 사명감을 토로하고 있거니와, 한창훈이 고향 거문도와 그곳 사람들을 단순히 글의 소재로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거처 방 한 칸을 도서관으로 꾸며 놓고 지역민들에게 개방했다. 아직은 30~40대 아낙 몇이 이용객의 전부이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방학을 맞아 귀향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도 이 도서관을 요긴하게 이용한다.

다시 돌아간 고향 거문도에서 그가 소극적인 관찰자 내지는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거문도는 어업 못지않게 관광이 중요한 경제활동의 일부가 되어 있는데, 나이 든 관광객들이 단체로 왔다가 백도와 거문도등대 같은 뻔한 관광지들만 서둘러 둘러보고 빠져나가는 데 대해 그는 아쉬움을 표했다. 젊은 여행자들을 끌어들일 만한 문화적 유인(誘因)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궁리해 낸 게 ‘작가 레지던시’ 구상이다.

“서도 변촌마을에 젊은 예술인들을 위한 레지던시를 꾸미려고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신청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입니다. 문학만이 아니라 예술 전반을 대상으로, 기성 작가들보다는 학부와 대학원생을 포함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요. 그들의 젊은 기억에 섬과 바다를 깊이 새겨 놓는다면 언젠가 거문도가 빼어난 예술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겠죠.”

고3 수험생인 딸을 만나러 한달에 한번꼴로 육지로 나가는 것 말고는 그는 주로 섬에 웅크려 있다. 다른 볼일들도 월 1회 육지행 일정에 맞추고자 한다. 바깥의 ‘손님’들도 가급적 오지 못하게 막는다. 피치 못할 경우에 한해 두어 달에 한번 정도 손님을 맞이한다. 글쓰기에 방해가 될뿐더러 섬에 들어와서부터 나가기까지 일일이 챙기자면 귀찮기 짝이 없기 때문이란다.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는 “외로움과 심심함을 못 견디면 섬에서 살기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섬과 바다가 어느 정도는 식량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생활비가 그다지 많이 들지는 않는다. 많지 않은 원고료와 인세로도 제 앞가림을 하고 딸 앞으로 적금 부을 정도는 된다고. 지금 사는 집은 남의 명의지만 “죽을 때까지 내 집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거문도에 들어온 건 일종의 회귀 본능과도 같아요. 말하자면 도 닦으러 들어온 셈이죠. 언제까지라는 각오는 딱히 없지만, 큰 변수가 없으면 계속 여기서 살 생각이에요.”

최재봉 문화부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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