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도현 시인이 작업실로 쓰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시골집 마루에 앉아 한여름 더위를 식히고 있다. 시인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부터 도망쳐 도시에서 떨어진 이곳에 피신처를 마련했다. 완주/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22) 시인 안도현의 ‘구이구산’
이 팍팍한 시절에꽃, 벌레나 읊조린다고 걱정
특별히 자연 편애가 아니라
자연이 내 일상인 것을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하면
또 걱정하는 분들 있어
시인과 시민 사이
어떻게 균형맞출까 고민이다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시,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본다”(<시인> 전문) 자신의 일곱 번째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의 서시 격인 작품 <시인>에서 안도현은 살구나무를 덥혀서 꽃을 피우는 보일러를 상상하고, 내처 시인으로서 자신의 몸 안에도 살구나무처럼 양질의 보일러가 가동하기를 기대한다. 같은 시집에 실린 <살구나무 발전소>라는 시에서는 보일러의 상상력이 발전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그래,/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살구나무 발전소> 부분). 역시 같은 시집에 실린 시 <관계>에서 시인은 “화들화들 꽃 피기 시작하는 저 살구나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와 살구나무 사이에는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그렇지 않다면 시인이 이토록 뻔질나게 살구나무를 노래할 턱이 없지 않겠는가!). 피가 뜨거운 시인은 사태를 설명하느라 ‘연애’니 ‘화간’이니 하는 말들을 불러오는데, 여기서는 일단 아름다움의 전염 또는 동맹 정도로 상황을 정리해 보자. 살구나무는 롤모델이자 스승
아름다움을 낳는다는 점에서 살구나무는 시인에게 일종의 역할 모델이자 스승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살구나무와 같은 미학적 생산의 보일러 또는 발전소를 꿈꾼다. 살구꽃은 물론 시인의 질투를 유발할 만큼 예쁜 꽃이다. 그러나 비슷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혼동하기도 하는 벚꽃이나 늦봄의 춘정을 자극하는 복사꽃도 아름답기로는 살구꽃에 결코 뒤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살구나무와 그 꽃을 특정해서 모델이자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소 허무하지만, 살구나무가 ‘거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거기’란 어디인가. 시인이 작업실로 쓰는 전주 인근 시골집이 바로 그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광곡리. 전주에서 남동쪽으로 30분 정도 차를 달리면 나오는 아담한 마을의 이 시골집 마당 한켠에 살구나무 선생님은 서 계시다. 시인이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98년 가을.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을 거쳐 어렵게 복직한 전북 장수 산서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둔 이듬해였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무식한 놈> 전문)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퇴근길> 전문) 아내와 아이들을 전주에 남겨 두고 홀로 자취방 신세를 져야 했던 산골 학교 시절 그는 쑥부쟁이며 구절초며 애기똥풀, 여치며 잠자리며 기러기 같은 자연의 물물들을 새롭게 발견했지만, 동시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아니면 버티기 힘든 일상에 지쳐 있기도 했다. 1996년에 발표한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의 성공은 그에게 글만 써서 먹고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4년 반에 걸친 복직 투쟁 끝에 돌아간 학교를 3년 만에 그만둔 그가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밑천 삼아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집이었다. “이른바 전업 작가가 되고서 집에 있자니까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 때문에 견디질 못하겠더라구요.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전화가 나를 불러내지 못하는 곳으로 피신해야겠다 싶어 찾은 곳이 여기였어요.” 10년째 비어 있던 집이라 손볼 곳이 많았다.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고, 해진 문풍지를 새로발랐으며, 뒤안에 팽개쳐져 있던 툇마루를 원래 자리로 가져와 아귀를 맞추었다. 베니어합판 천장을 뜯어내서는 서까래와 애자를 드러낸 채 황토로 벽을 마감했으며, 마당의 잡풀들을 없애고 잔디를 깔았다. 담을 따라서는 화살나무 산딸나무 소나무 이팝나무 같은 나무도 십여 그루 심었다. 새로 심은 나무들 말고 감나무 두 주와 배롱나무 가죽나무와 함께 ‘원주민’에 해당하는 나무 중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
|
안도현 시인이 전교조 해직 경험과 이즈음의 트위터 활동 등에 관해 이야기하며 웃고 있다.(아래) 동무들이 선물한 ‘구이구산’이라는 편액이 벽에 걸려 있다.
완주/김태형 기자
|
오전 아홉시면 이 집으로 출근해 저녁 대여섯시에 퇴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책 몇 권과 노트북 컴퓨터가 유일한 작업 도구였다. 텔레비전은 물론 라디오도 없었다. 뒹굴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지치면 마당의 풀을 뽑거나 담 밑에 심은 채소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전주 아파트와 시골 집을 오가면서 여러 권의 산문집도 냈지만, 무엇보다 많은 시를 건진 것이 뿌듯했다. 이 집을 드나드는 동안 그는 <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 <북항>(2012) 등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이 집과 주변의 자연을 소재로 쓴 시들만도 100편은 넘을 것이라고 그는 추정했다. 그렇게, 이곳 시골집에서 그는 남부럽잖은 부자다. 의심스럽거든 여기 그의 자산 목록과 그만의 재테크 비법을 보라.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공양> 전문) “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 씨를 뿌렸다/ 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 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 또 스무 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 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재테크> 부분) 2004년 가을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전임으로 다시 교단에 서면서부터는 주말에만 들르게 됐다. 일주일을 비워 두었던 집에 오면 우선 방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하며 그새 마당에 우북하게 자란 풀을 뽑는 게 일이다. 그런 것들은 물론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노역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시를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옥에 와서 맨 처음 하는 일은 마루 위의 박쥐 똥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일//(…)// 밤새 서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전깃불을 밝히면 박쥐는 나한테 똥 눌 자리를 빼앗겨버린 박쥐는 벽에 납작 달라붙지도 못하고 밤새 얼마나 똥자루가 먹먹할까 생각한다// 아아, 한낱 서생인 내가 서책 따위를 읽으려고 불을 밝힘으로써 박쥐가 배변 주기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한다”(<박쥐 똥을 쓸며> 부분)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 형광등 불빛 따라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 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 나를 내려다보며 읽고 있다//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나는 한 마리의 슬픈 포유류”(<모기장 동물원> 부분) 시골집에서 쓴 안도현의 시들 중 상당수는 뒤집어보기의 방법론을 거쳐 빚어져 나온다. 제 돈을 주고 사서 제 손으로 고쳐 살고 있는 시골집이지만, 그 집의 주인은 인간 안도현이 아니라 박쥐라고 그는 믿는다. 모기장을 쳐 놓고 들어앉아 있는 자신이 모기장 밖 곤충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닫는 순간 그의 시는 태어난다. 그렇게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설정되어 있는 위계를 허물고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데에서부터 안도현의 시는 비롯된다. 얼마 전에 나온 그의 열 번째 시집 <북항>의 서시에 해당하는 작품 <일기>는 전형적이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일기> 전문) 트위터 5개월차, SNS 세계에 푹 빠져
별행으로 처리된 이 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연은 자신의 자연 ‘편향’에 대한 지적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읽힌다. 한낱 국화꽃과 사슴벌레, 감나무와 기러기의 안위에나 신경을 쏟는 게 이 팍팍한 시절에 가당키나 한 일이냐, 하는 식의 비판에 그는 오래 노출되어 왔다. 현실이 소거된 그런 자연은 진짜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가짜 자연이라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일기>의 마지막 행/연은 그런 시비에 대한 시인의 항변이다. “저를 어쩔 수 없는 농경문화 정서를 지닌 촌놈 식으로 오해하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있습니다. 시골집은 저에게는 서울 사람들의 오피스텔 같은 거예요. 다만 자연이 덤으로 주어진 것이죠. 제가 특별히 자연 친화적이라서가 아니라, 여기서는 자연이 저의 일상이다 보니까 그 일상에 대해 쓴 게 제 시들이 된 거죠.” 사실 안도현은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에서부터 역사 및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아 왔다. 전교조 해직 경험과 386세대로서의 자부심이 그에게 단순한 음풍농월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당시 추모시를 쓴 데 이어 올해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최근에는 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담쟁이 포럼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데에서 그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지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사과나무 보내기 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진보 문인 단체인 한국작가회의의 전북 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시집 <북항>을 내고서 한 인터뷰에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2년 동안 시를 한 편도 쓰지 못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저는 지금이 ‘정치’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스무 살 이후 꿈꿔 왔던 나라가 이 정부 들어선 뒤 완전히 거꾸로 가 버렸어요. 제가 쓰는 시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메꿀 것인가가 요 몇 년 동안 저의 고민입니다. 글쟁이 역시 공인이자 시민인 이상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바꾸는 데에 눈곱만큼이라도 관여하고 싶다는 게 제가 생각하는 정치예요.” 얼마 전에는 야당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빼려는 교육 당국의 처사에 분개해 교과서에서 자신의 작품들 역시 빼 달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황을 바로잡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안도현 시인의 트위터 활동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는 게 그 사건의 부차적 효과 중 하나가 된 셈인데, 그가 트위터를 시작한 것은 4월이었고 지금은 약 1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다. “트위터를 해 보니 소식이 제일 빠른 게 이 동네더군요. 자세히 읽지 않고 쓰윽 들여다보기만 해도 세상의 흐름을 알 수 있어요. 또 글자 수에 제한이 있어서 저처럼 시를 오래 써 온 사람한테 잘 맞는 것 같아요. 트위터를 하면서는 일기 쓰듯이 하루에 몇 번씩 글을 올리고 있어요. 제 생각으로는 트위터라는 양식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 같아요.” 구이면에 있대서 동무들이 ‘구이구산’(九耳九山)이라는 편액을 선물해 준 호젓한 시골집에서 지금 안도현 시인은 살구나무와 트위터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재봉 문화부 기자 bong@hani.co.kr 영상은 한겨레티브이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