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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07 19:37 수정 : 2012.09.10 10:22

‘포도 농사꾼 시인’ 류기봉(오른쪽)이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자신의 포도밭에서 갓 수확한 포도를 앞에 놓고 포도 농사와 문학을 병행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남양주/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24) 시인 류기봉의 남양주 포도밭

처음엔 시를 쓰고 싶어
나중엔 스승 김춘수를 만나
그리고 들풀들의 아우성에
그는 농부시인이 되기로 했다

“포도밭을 원고지” 삼아
올해 15번째 예술제를 열고
몇 년 만에 시집도 냈다
류기봉 포도를 사면 끼워준다

“이제 그만!/ 멈추어 달라고,/ 들풀들이 일제히 흐느낀다.// 오늘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기로 했다.”(<들풀들의 데모> 전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시인 류기봉에게는 크게 두 가지 삶의 전기가 있었다. 하나가 어느 해 여름 포도밭에 제초제를 뿌리던 중 듣게 된 들풀들의 아우성이었다.

“여느 때처럼 분무기를 들고 제초제를 뿌렸어요. 분무기가 뿜어내는 제초제의 물살에 풀들이 흐늘거리더군요. 그런데 그날따라 그걸 보는 느낌이 달랐어요. 풀들이 흐늘거리는 모습이 꼭 흐느끼면서 항의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포도나무에 해로운 잡초로만 알았던 풀들도 나름대로 소중하고 가치있는 생명이라는 깨달음이 퍼뜩 왔어요. 그날 이후로 제초제를 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비료를 넘어선 아들의 지렁이
그와 비슷한 무렵에 그는 ‘자연농법’과 만났다. 충북 괴산의 자연농업학교에 입교해 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동네의 포도작목반 총무로서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농협 교육 프로그램이었던 터라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임했다. 그러나 첫날 강의를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별 쓸모 없을 거라 생각했던 쑥이며 미나리, 냉이, 포도순 등이 훌륭한 자연비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음식물 찌꺼기나 바닷물도 잘 발효시키면 포도나무의 먹이로 손색이 없었다. 이렇듯 자연의 재료들을 활용하면 화학비료를 쓸 때에 비해 비용도 줄고, 친환경 농산물로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집에 오자마자 큰 항아리를 준비했어요. 항아리에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흑설탕을 뿌렸습니다. 그런 방법을 반복해서 항아리가 어느 정도 차면 주둥이를 창호지로 막아 숨을 쉬면서 발효가 되도록 해서 액비를 만들고 그걸 포도나무에 뿌려 주었어요. 쑥, 미나리, 냉이를 비롯해 각종 풀로도 엑기스를 만들어 비료 대신 포도나무와 흙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제기동 약령시장으로 달려가 한약 찌꺼기를 가져다 나무 아래 놓아두었어요. 포도나무에게 좋은 밥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게 가꾼 그의 포도밭은 지렁이 천국이다. 그는 몇 만에 이르는 지렁이들의 대장을 자임한다. 그 지렁이들은 갈반병, 잿빛곰팡이병, 새눈무늬병 같은 포도나무 잎 병을 물리치는 용감한 병사들이다. 그는 병에 걸린 나무들에 약을 치는 대신 지렁이를 믿고 견디라고 당부한다. 그가 하는 일은 흙에 천연 거름을 주고 풀을 뜯어서 덮어 주는 일뿐이다. 그렇게 하면 지렁이들이 알아서 먹고 배설하면서 흙을 건강하게 만든다. 그렇게 건강한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병충해에도 강한 내성을 지닐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나무에게 밥을 주었습니다./ 돼지똥하고 톱밥/ 을 발효시킨 퇴비,/ 지하 40미터에서/ 캔 석회 가루, 한약 가공 공장에서 부스러기로 나온/ 한약 가루를 나무에 뿌렸습니다./ 소뼈, 돼지뼈, 달걀 껍질 가루를 뿌렸습니다./ 약간의 화학비료도 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눈치를 모른 척하였습니다.”(류기봉 <나무의 밥> 앞부분)

‘시인 류기봉 포도’라는 브랜드를 단 그의 포도는 농림수산식품부의 유기농 인증을 받은 유기농 포도다. ‘류기봉’이라는 이름부터가 유기농을 떠오르게도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유기농을 택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포도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다른 많은 농부들처럼 농약과 제초제, 화학 비료를 사용하는 화학농법 또는 관습농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농사에는 뜻이 없이 시인이 될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던 그 역시 아버지의 농사 방식을 별 반성 없이 따라 했다.

“중고교 시절부터 절실하게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대학도 나왔으니 취직하고 결혼도 하라셨지만, 저는 취직이나 결혼보다는 시가 우선이었어요. 결국 시인으로 등단할 때까지만 포도 농사를 도우면서 시를 쓰기로 아버지와 합의를 했지요. 최소한도로 일을 도와드리면서 나머지 시간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시를 습작했지요.”

<꽃>의 시인 김춘수를 만난 것이 이 무렵이었다. 문학 강연에서 처음 뵙고 인사를 드린 뒤부터 그는 자식처럼 김춘수 시인을 모셨다. 마침 시인은 그의 동네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살고 계셨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산책을 같이 하고 가까운 거리로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시인한테서 시 쓰기에 관해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곁에서 무심히 던지는 말씀을 새겨듣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다. 함께했던 경험이 시로 발표된 것을 보면서 경험이 어떻게 시로 바뀌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다. 1993년이었다.

류기봉 시인이 갓 딴 포도를 들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남양주/이정아 기자
들풀들의 흐느낌과 아우성을 듣다
그토록 바라던 등단도 했으니, 아버지와의 약속대로라면 이제 취직을 해야 했다(결혼은 그 사이에 했다). 그런데 생각이 달라졌다.

“김춘수 선생님을 자주 뵙고 문학과 삶에 대해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취직하면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기는 어려워질 것 아니겠어요? 그 때문에 부모님과도 껄끄러웠죠. 저부터도 취직을 해야 할지 아니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어야 할지 선택을 놓고 고민하던 차에 들풀들의 아우성을 들은 거예요.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포도 농사를, 그것도 화학농법이 아니라 자연농법으로 짓기로 마음을 먹은 거죠.”

그렇게 스스로 깨달은 것과 자연농업학교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유기농과 자연농법에 의한 포도 농사를 지으려니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오랫동안 화학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온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약간의 비용만 지출하면 농약과 비료 등으로 손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어렵게 전통 자연 방식을 고집하는 아들을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들과 아버지가 밭을 나눠서 각자의 방식을 시도해 보기도 여러 해였다. 그러나 늙어서 기력이 쇠한데다 눈도 침침해진 아버지는 마지못한 듯 서서히 아들의 방식을 따라왔다. 포도 농사꾼의 상징과도 같은 전정가위를 3년 전 아들에게 넘기는 것으로 아버지는 포도 농사에 관한 전권을 아들에게 위임했다.

“말이 좋아서 유기농이고 자연농법이지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좋은 것들을 열심히 먹인다고 먹였는데 나무만 살찌고 열매는 안 열리질 않나, 화학농법에서 자연농법으로 바꾸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시기를 두고 조금씩 바꿔야 하는데 의욕만 앞서다 보니까 계속 실패를 겪었죠.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습니다. 약을 안 치고 비료도 안 주는데, 소출이 화학농법의 3분의 1 수준은 되니까요. 내년엔 그 수준을 절반 정도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성공인 거죠.”

그의 포도 과수원 바닥에는 온갖 들풀들이 수북이 자라 있다. 흙을 헤집으면 지렁이들이 우글거린다. 폭우에 대비한 반가림막이 쳐진 가운데 포도밭 곳곳에는 유인살충제용 병과 해충포획기가 설치돼 있다. 방가지똥, 애기똥풀 등 살충 효과가 있는 풀들을 현미식초와 흑설탕과 함께 넣은 병을 나무에 걸어 두어 벌레들이 빠지면 그것을 발효시켜서 흙에 뿌린다. 해충도 잡고 거름도 되고 일석이조다. 해충포획기 역시 마찬가지다. 한동안은 나무들에게 바흐며 모차르트 같은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얼마 전부터는 그것도 그만두었다. 대신 새소리와 바람소리, 빗소리를 듣게 했다. ‘자연 그대로’라는 자연농법의 대원칙에 충실하고자 한 결과다.

류기봉의 삶의 두 번째 계기는 김춘수 시인의 말씀이었다.

“구제금융 여파로 포도 판매가 줄어든 1998년 봄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산책을 하던 중 제가 투정을 부리듯 사정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예전에 프랑스의 어느 작은 포도 마을에 가 봤더니, 그 포도밭에서 포도만 파는 게 아니라 그림도 걸어놓고 음악회도 열고 시 낭송도 하면서 각종 문화 축제를 벌이더군. 마침 류 군도 시를 쓰면서 농사를 지으니 그런 문화 행사를 곁들이면 어떻겠나? 나도 힘 닿는 데까지 돕겠네.’”

김춘수 나무, 박완서 나무, 정현종 나무…
올해로 15회째를 맞는 ‘포도밭예술제’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햇포도를 수확하는 9월 첫째 토요일을 전후해서 열리는 이 행사에서는 시인들이 무명천에 직접 쓴 시가 포도나무에 걸리고 포도밭의 사계를 담은 사진전이 펼쳐지며 음악회와 포도주 시음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올해도 조정권·이승하·심언주 시인 등과 가수·소리꾼·색소포니스트 등 예술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8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예술제가 열린다. 처음에는 자비를 들여 치렀던 이 행사를 지금은 남양주시와 대산농촌문화재단이 후원하고 있다. 그만큼 문화예술계와 지역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다. 류기봉의 포도밭에는 작고한 김춘수·박완서를 비롯해 정현종·정진규·이수익·서정춘·노향림·이문재 등 시인들의 나무 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업과 문화가 만나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포도는 음식이 아니라 문화라고 믿습니다. 밭에 있는 포도는 먹을거리지만, 포도밭에 시가 있고 그림이 있고 음악이 있으면 포도는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포도밭예술제는 포도를 문화로 승화시키는 자리인 셈이죠.”

이런 취지에서 그는 자신의 농사에 ‘문화농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해가 뜨기 전인 새벽 5시에서 아침 7시 사이에 포도를 수확하는데, 포도를 따는 그만의 기준이 따로 있다. 다름 아니라 스승인 김춘수 시인의 <꽃>을 마음속으로 음미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포도송이를 둘러싼 봉지를 살짝 열었을 때 알맞은 빛깔과 향기를 내뿜는 포도를 골라 그는 ‘포도!’라 이름 부르면서 거두어들인다.

자신의 포도밭에서 그가 스승의 시를 읊조리거나 동료 시인들의 시를 나뭇가지에 매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인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농사와 시업을 일치시키는 데에 게으르지 않다.

“포도밭은 원고지다/ 내가 풀을 베면 시가 짧아진다/ 그대로 놔두면 시가 시끼리 엉켜 덥수룩해진다/ 휑하게 자라게 두고/ 덥수룩해지면 지루하지 말라고 쳐 주곤 한다/ 가지를 팍팍 쳐 주라고들 한다/ 줄기를 뻗다 말고 뱀딸기가 멈칫한다// 오늘 아침에 순서대로 햇빛, 바람, 삽, 운반기, 의료보험고지서가 왔다/ 어제 왔던 햇빛, 오늘 온 햇빛, 내일 지나가는 햇빛이 다르다/ 그것들이 와서 하는 말을 받아 적는다/ 받아 적기만 하면 된다/ 그것들은 오자 탈자가 없는 완벽한 시를 쓴다”(<즐거운 받아쓰기> 부분)

그렇게 포도밭에서 받아 쓴 시들로 그는 시집 <장현리 포도밭> <자주 내리는 비는 소녀 이빨처럼 희다>와 포도 시선집 <포도 눈물>, 그리고 산문집 <포도밭 편지>를 냈다. 스승 김춘수 시인이 돌아가신 2004년 이후 새 작품을 쓰지 못했던 그였는데, 올해 드디어 다시 시가 왔다. 하루에 예닐곱 편을 한꺼번에 쓰기도 했다.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시 쓰여진 시 가운데 36편을 묶어 소시집 <이제 모자를 벗으세요>를 펴냈다. 그러나 이 시집을 시중 서점에서 구할 수는 없다. 비매품이기 때문이다. 그의 포도를 마트에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인 류기봉 포도’는 대부분 직거래로 소비자를 만나는데, 그의 비매품 시집 1000부는 그 포도 상자에 담겨져 소비자 겸 독자들을 찾아간다.

“장현리 유기봉군 포도는/ 하얀 봉지에 검은 곰팡이가 가득하다/ 날파리들이 날아오르고/ 비가 오면 하나, 둘, 알들/ 옆구리가 터진다./ 포도는 서로 둥그러지면서 맛이/ 드는 법인데/ 유기농을 찾으시면서/ 유기봉 포도를 저리 치워 버리고/ 모양 좋고 빛깔 예쁘고 큰 것만 고르시는 김 여사님!/ 아시죠/ 아시죠/ 좋은 것에는 항상 번외 된 과일이 있습니다./ 못난이 유기봉 포도같이,”(<유기봉군(君) 포도같이> 전문)

최재봉 문화부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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