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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민규가 연희동 작업실에서 시력측정용 안경을 쓴 채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작업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뒤쪽으로 두 번째 책상이 보인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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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마지막회-(26)박민규의 연희동 작업실
한 책상에선 미국 포르노배우 다른 책상에선 한국 고딩 이야기
미터 남짓한 두 책상 사이에 평양이라는 공간이 놓인 셈
평론가의 평가, 문인과의 대화
독자와 만남 다 귀찮아요
나라들끼리 문학 교류는 무슨…
서로 침략이나 안하면 됐지
사실은 글만 쓰는 게 젤 좋아요 알려준 주소를 ‘내비’에 찍고 기계가 안내하는 대로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 주변에 보이는 상호며 건물을 주워섬겼건만,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눈치다. 무슨무슨 쇼핑센터 이름을 일러주며 거기서 다시 전화를 하란다. 내비에 쇼핑센터를 찍으니 바로 길 건너, 눈에 빤히 보이는 곳이다. 차를 돌려 쇼핑센터 앞으로 가서 다시 전화를 했다. 채 5분도 안 걸려서 나타난 그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다시 길 건너. 처음 전화를 했던 곳이다. 전화로 읊었던 건물과 가게를 가리켜 보이자 ‘이런 게 여기 있었나?’ 하는 표정이다. 소설가 박민규의 연희동 작업실 방문 이야기다. 글쓰기 모드로 돌아갈 땐 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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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보내 준 전구 램프와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탁상시계, 주의를 환기시킬 때 울리는 벨이 올려진 정갈한 책상.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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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폴 & 메리’는 물론 1960, 7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혼성 포크그룹 이름. 박민규는 자신의 소설 주인공인 포르노 배우들에게 이 이름을 붙여 주었다. 독자가 인터넷에서 <피터, 폴 & 메리>를 읽으려면 성인인증을 해야 한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미성년자들의 접속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가 오히려 어른 독자들의 속된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읽어 보면 알겠지만, ‘후끈한’ 장면은 거의 없을 거예요. 오히려 길고 지루한 소설이 될 겁니다. 포르노 산업 이면의 돈과 인간,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는 이 세계에 관해 쓰려는 거예요. 세상과 인간에 대해, 마지막까지 감추고 있는 걸 벗기는 장르가 포르노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서 성에 관한 사회의 금기를 깨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포르노 역시 당사자들에게는 삶의 한 형태일 뿐, 다른 이들의 직장생활과 차이가 없는 거거든요.” 2003년 장편 <지구영웅전설>과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문학동네작가상과 한겨레문학상을 연이어 받으면서 등장한 박민규. 작가 생활 10년째인 그는 스스로 ‘문학2기’라는 표현을 써 가며 10년차 전업작가의 각오를 새삼 다졌다.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었고, 문학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로 작가가 되었어요. 처음 몇 년은 뭐가 뭔지 모르고 달려왔는데, 해 오면서 차차 생활도 조율되고 인간관계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는 방법도 찾게 되었어요. 이제는 소설을 쓰는 데에 좀더 집중하고 몰입하고 싶어요.” 그가 춘천에서 서울로 공간을 옮긴 뒤에도 문단 안팎의 모임에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서른여섯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한 그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버릇처럼 입에 올리곤 한다. 써야 할 글감에 비해 글을 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 하나를 쓰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이야기가 떠오르곤 해요. 먼저 착수한 작품을 빨리 끝내야 다음 작품에 돌입할 수 있잖아요? 너무 지체되면 이래저래 못 쓰게 되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없는 거예요.” 예술가들이 겪는 창작의 고통 중에 커다란 것이 아이디어의 고갈인데, 박민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인 듯했다. 그는 쓰는 속도보다 머릿속에 새로운 글감이 떠오르는 속도가 더 빠른 ‘행복한’ 글쟁이로 보였다. “내가 어떤 걸 글로 쓰고 싶다거나 구상을 한다기보다는, 이야기라는 게 세상에 떠돌고 있는데 내가 우연히 그 근처에 오게 돼서 이야기와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만난 이야기들을 가능한 한 많이 활자와 책으로 변환시키고 싶어요. 더 늦기 전에요.” 은둔과 금욕의 작가 마루야마 겐지 같은 예외도 있지만, 보통의 작가들은 동료 문인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여행도 하며 이야기도 섞게 마련이다. 글쓰기의 긴장과 고통을 해소하고 비슷한 처지들끼리 위안과 격려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술과 여행과 대화가 예술적 영감을 자극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박민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에게는 혼자만의 골방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 이외의 대외 활동은 모두가 부질없는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문단 모임 같은 데에 나가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거나 유익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어요.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까 그저 술만 마시고, 결국은 서로 취해서…. 저도 술을 좋아하고 과거엔 꽤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술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을 여럿 봐서인지 이제는 술을 조심하게 돼요. 나이가 들면서 혼자 술 마시는 취미를 들였다는 이들도 있던데, 저는 혼자서는 술을 안 마셔요.” 서울에 와 있다 보니 춘천 시절에 비해 확실히 연락과 간섭이 많아졌는데, 그는 웬만하면 거절하는 편이다. 요즘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술자리에 나갈 뿐 나머지 시간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다. 주5일 연재하는 창비 블로그 소설 원고를 금요일 아침에 보내 놓고는 용인 집으로 가서 가족과 함께 주말을 지내고 일요일에 작업실로 돌아온다. 해외 문학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문인들의 외국 걸음이 잦다지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작가로서 다녀온 여행은 몇 해 전 한국문학번역원 주선으로 멕시코 과달라하라 도서전에 참가한 것이 유일했다. 고은, 마루야마 겐지, 박완서를 떠올리다
“멕시코는 꼭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그밖에는, 여행이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요. 굳이 여행 갈 필요 있나요? 사진 보고 상상하면 되지.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해서 알리고 하는 것도 너무 이상적인 일 같아요. 서로 침략이나 안 하고 살면 되지 그 무슨 문학 교류씩이나…, 그런 생각이에요. 남들이 보기에는 처박혀 있는 것 같겠지만, 저에게는 소설 쓰는 게 늘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말을 듣다 보니 박민규에게는 모든 길이 소설로 통하는 듯했다. 그런 박민규가 소설이란 것을 쓰기는커녕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도 서른이 넘어서였다. 그는 대학 문창과 출신이긴 하지만, 학창 시절에는 시를 썼고 독서도 시집으로 제한되었다. 졸업 뒤 해운회사 영업직 사원을 시작으로 광고회사를 거쳐 출판 관련 잡지 <베스트셀러>까지 8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문득 소설이 쓰고 싶어졌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소설을 쓴다니, 웬 삼천포?’라는 주변의 반응에 오기가 생겨 정말 삼천포(사천)로 향했다. 거기서 처음으로 쓴 몇 편의 소설 중에 <지구영웅전설>과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있었다. “처음엔 소설은 무조건 장편만 있는 줄 알았어요. 단편이란 게 있다는 사실은 등단한 뒤 소설 전공하는 선배와 대화하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죠. 무언가 망친 기분이 들더군요. 결국 뒤늦게 혼자서 단편을 잔뜩 써 놓고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어요. 시와 달리 산문은 행갈이를 하지 않고 붙여 쓴다는 것, 다 쓰고 나면 퇴고 과정을 거친다는 것도 몰랐을 정도로 소설에는 문외한이었어요.” 박민규의 이런 고백은 거의 믿기 힘들 정도여서 묘하게 신화적 아우라를 풍긴다. 소설이라면 장편만 있는 줄 알았고 장편으로 등단한 뒤 비로소 단편을 습작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작고한 박완서의 경우를 떠오르게도 하지만, 박민규는 선배 작가의 그 일화 역시 듣지 못했노라고 했다. 그랬던 박민규에게, 지금은 소설이 거의 종교에 육박하는 지위를 지니는 듯했다. 가족 이외의 다른 모든 관계와 활동이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왜일까. “소설을 쓰다 보면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 결과 삶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그에게 소설 쓰기가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확실히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어떤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직 공복인 그와 자리를 옮겨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마저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뷰 뒤에는 연희동에 많고 많은 중국음식점 중 한 곳을 골라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객들이 제 흥에 겨워서 홀짝이는 고량주도 그는 입술을 적시기나 할 뿐이었다. “평론가들의 평가, 독자와의 만남, 동료들과의 대화… 다 귀찮아요. 사실은 글만 쓰는 게 제일 좋습니다.” 원고를 마감하러 다시 작업실로 향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독자들의 궁금증을 핑계로 그가 싫어하는 ‘부질없는 대외 활동’에 그를 억지로 끌어낸 듯해 마음이 못내 불편했다. 다음날 출근해 보니 그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동영상은 올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끝> 최재봉 문화부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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