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29 17:05
수정 : 2012.02.29 17:05
|
한동원 나의 점집문화답사기
|
[매거진 esc] 나의 점집문화답사기
신점편 ② 대기실
지난 회에서 ‘역삼동 ○보살’의 하우스가 평범한 주택가에 은밀히 입지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은밀함은 입구(즉, 현관문)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던바, 하우스로서의 표지는 오로지 예약 시 점지받은 ‘20×’라는 호수뿐이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극도의 미니멀리즘으로 득하여지는 이러한 은밀함이야말로 점의 대량생산 추세에 반발, 커스텀적 지향을 추구하는 마니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최고의 외관인 것이다. 생각해보시라. ① ‘서울에서 제일 용한 신점집-○○암(庵). 예약 필수’ 운운하는 펼침막을 시내 번화가 사거리에 내건 기업형 점집 ② 연등, 깃발, 작두날 줄줄 달아 놓은 테마파크형 점집 ③ 당 하우스 같은 비밀 안전가옥형 점집 중 어느 쪽이 가장 높은 운명철학적 카리스마를 발하겠는가. 아무튼.
매우 고전적인 ‘즐거운 우리집’ 멜로디 초인종과 함께 문을 열어 은밀히 예약자명을 확인한 인물은 다름 아닌 전화예약을 받았던 ○보살의 배우자 겸 매니저 겸 비서였는데, 개량한복(왜 아니겠는가) 밑으로 드러나는 호리호리한 몸매, 어둑한 실내에서도 빛을 발하는 매끈한 안색, 매혹의 바리톤에 걸맞은 쾌남형 미소 등 이 남성의 철저한 자기관리의 흔적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나도는 전설이 과연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약 세 평 남짓한 대기실(즉, 거실) 벽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던 ○보살과 이 남성의 대형 웨딩사진이었던바, 그랬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신점 시술자의 모습을 접하는 것은 상당히 유체이탈적 경험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긴 뭐 그렇다. 안 될 건 또 뭔가. 보살 역시 웨딩사진을 찍고 또 걸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 이 부부가 영위하고 있는 보살업이라는 업종의 특성을 생각해보자. 카드결제 절대 불가의 일백프로 현찰 박치기. 한 달에 가까운 대기기간이 말해주듯 안정된 수익구조. 게다가 세금은 일체 내지 않는다. 보살업을 제외하고, 이런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업종은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뿐이 아닌가. 그런 희소성 높은 고소득 전문 업종을 부부 함께 영위하는 마당에 도대체 금슬이 좋지 않을 수가 없는 관계로다가 ○보살 커플은 업무공간에 웨딩사진 걸어 만방에 그 금슬 과시치 않고 싶을 수 없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웨딩사진과 컴퓨터 책상을 제외하고는 가구도 없는 이 단순한 대기실에는 젊은 커플 한 쌍이 앉아 있었다. 필자를 향해 짧지만 뚜렷한 경계의 눈길을 보낸 이들은 극도로 절제된 단어 수의 밀담으로 돌아갔는데,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던 그 토막 대화를 종합해본 결과, 이들은 결혼을 앞두고 집안의 강력한 블로킹에 부딪쳐 번뇌하는 매우 클래식한 피점술자 커플이었던 것이다.
그 사연 은밀 듣고 있는 필자 자신의 인격이 스스로도 왠지 점점 조잡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들리는 걸 또 안 들을 수도 없고 해서, 국민교육헌장과 코사인 제2법칙을 교대로 암송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쪽으로 귀 기울이며, 이거 참 민망토다, 기왕이면 최신가요라도 좀 틀어놓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느닷없이 필자의 귀를 강타하는 일갈대성이 터져 나왔으니, 대기실 전체를 일순 얼어붙게 한 그 벽력같은 목소리는 바로 점술 시술공간인 침실(전문용어로 법당)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다음 회에 계속)
한동원 소설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