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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14 16:55 수정 : 2012.03.14 16:55

한동원 나의 점집문화답사기

[매거진 esc] 나의 점집문화답사기
신점편 ③ 첫 조우

지난 회에서 고요한 대기실을 일거에 뒤흔든 법당(즉, 침실)의 일성대갈까지 얘기했다. 운명철학적 경륜 및 식견 풍부하신 마니아 독자께서는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보살이었던바, 방음장치 결코 돼 있을 리 없는 일반 다세대주택의 문짝을 뚫고 흘러나온 그 내용은 굳이 염탐하려 애쓰지 않아도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려왔는데, 그 내용인즉슨 양다리 걸치는 남자친구 문제로 얼마 전 ○보살에게 상담을 받은 처자가 ‘그 ××는 평생에 도움이 안 될 ××니 당장에 내치라’는 ○보살의 추상과도 같은 엄명을 거스른 채 그 남자친구를 계속 만나 오다가 결국 지난번과 똑같은 문제로 또다시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아아, 사랑이란 과연 만신님도 못 말릴 운명의 화염방사기이런가! 아무튼.

갓 신내림 받은 보살의 팔팔한 기개 담아 장작 패듯 날리는 반말과 작두날 같은 욕설과 질책과 질타의 향연을 엿듣던 필자는, 반말 및 욕 타작 쉽사리 안 들어먹을 초진 고객임을 하늘에 우러러 감사함과 동시에, 자칫 ○보살의 심기 잘못 건드렸다간 개인신상 및 상담 내용이 대기실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수가 생기리라는 두려움에 굿판 대나무 떨듯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제 와 돌이켜보건대, 대기실을 지배하던 정적과 법당의 역(逆)방음 시스템이야말로 피점술자들에 대한 기선 제압 및 점술자의 권위를 사전에 확립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장치였다 사료되는바, 대기실에 걸린 웨딩 사진으로 1차적으로 혼미케 된 정신을, 법당으로부터 누출되는 반말과 욕설 및 울먹임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점술자의 우월적 지위와 권위를 확고히 선점하고 들어가는 이 2단계 대기실 전(前)처리 시스템은 ○보살이 보살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이유를 능히 짐작하게 하였다.

이윽고 할당시간이 종료된 듯, 욕설과 질타가 잦아들며 뭔가 다독이고 정리하는 분위기의 대화가 오가는가 싶더니 마침내 법당의 문이 열렸다. 마스카라 시커멓게 얼룩진 얼굴 곳곳에서 이젠 기필코 양다리 남자친구를 떨쳐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 빛내는 피점술자(약 20대 후반의 대단히 멀쩡해 보이는 여성)의 등 뒤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보살. 그녀의 실루엣으로부터 얻은 첫인상은, 그랬다, 세상의 모든 웨딩 사진이 그러하듯, 사진 속 인물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장기도 전혀 없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다. 의상 역시 민간여성들의 하절기용 홈웨어로 애용되는 하늘하늘 얇은 베이지색 원피스다. 그렇다. ○보살의 비주얼은 보살업 종사자라기보다는 방금 전 장을 봐 온 대파와 당근 씻어 놓고 이제 막 밥을 안치려고 하는 주부의 형국에 가까웠다 할 것인데,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러한 평범한 의상 및 외관이야말로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통해 신점 시술자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확립하기 위한 ○보살의 전략적 비주얼임을.

한참을 들어먹은 욕으로 대거 궤멸된 피점술자의 마음을 달래려는 듯, 문간까지 고객을 배웅한 뒤 재빨리 다시 법당 안으로 사라진 ○보살.

마침내 예의 그 매혹의 바리톤으로 필자의 성명이 호명되었다. 이제 ○보살과의 본격 대면이다. (다음 회에 계속)

한동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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