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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13 18:51 수정 : 2013.02.13 18:51

[매거진 esc] 나의 점집문화답사기
사주점편 외전-성명점편 ⑦

지난 회, ○○할머니가 가짜 성명/생년월일시로도 제법 적중률 높은 성격/기질 예측을 해내는 ‘과도한 적중의 오류’를 범했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할머니야말로 진정 놀라운 작두만신적 신통력의 소유자인 걸까.

하지만 기억하시라. ○○할머니가 당해 답사 초반에 숙달된 조교 ○○○씨의 기혼/미혼 여부를 전혀 적중시키지 못했던 것을. 그렇다면 결론은 결국 하나로 모이는데, 뭐,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 눈치 및 통빡이라면 거의 대한민국 기능장 수준인데다, 점집 가서 그런 거 너무 따져대는 건 반칙이니 이쯤에서 대략 접고, 이제 서두에서 얘기했던 영화 <서칭 포 슈가맨>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드리게스’는 바다 건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슈퍼스타였지만 정작 고국인 미국에서는 완전한 무명이었다. 그런데 그가 만일 남미 히스패닉스러운 본명 대신 북미 백인스러운 예명을 썼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걷게 됐을까? 글쎄, 알 수는 없지만, 남미스런 성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카를로스 산타나’ 같은 인물이 엄연히 존재하는 걸 보면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게다.

나아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질문 자체가 그닥 적합지 못하다는 생각 말이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이름이었어야 성공했을까’가 아니라 ‘어떤 것들에 성공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가 아닐까.

(주의-여기서부터 스포일러)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음악이 남아공에서 거둔 엄청난 성공을, 30년 동안 전혀 알지 못한 채 음악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거칠고 힘든 일로 생계를 꾸려간다. 하지만 영화 속의 그는 그런 자신의 운명에 ‘실패’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대신 덤덤히 웃음을 지을 뿐이다.

더구나 그는 갑자기 30년 만에 남아공으로부터 날아든 행운 앞에서도 변함없이 똑같은 웃음을 짓는다. ‘살아 있는 전설’로 자신을 맞아주는 남아공 사람들의 환호에 파묻히지 않고, 노련한 서퍼처럼 부드럽게 그 위에 올라탄다. 파도가 다시 잦아든 뒤에는 애써 그것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그렇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진 대목은 로드리게스가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손에 넣은 순간이 아니다. 손안에 날아든 그것을 몇 번 만져보고 음미한 다음 다시 그것을 놓아 손을 비우는 순간이다. 타인들이 ‘성공’이나 ‘행복’이라 이름 붙인 것을 붙들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불행으로 몰아넣는 수많은 사람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기적을 보는 순간이다.

하여 ‘로드리게스’라는 성명은 처음부터 작명철학적 ‘실패’일 수도 ‘성공’일 수도 없었다. 로드리게스에게 ‘실패’와 ‘성공’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명사였으므로.

응? 그런데 그가 그러한 인생관의 소유자인 것도 다 이름을 잘 지은 덕분이라고?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뭐라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음이다. 그대의 성은 ‘점집’이요, 이름은 ‘마니아’라는 말씀 외엔. <성명점편 끝>

한동원 소설가 @HahnDo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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