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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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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심정희의 반하다
패셔니스타와 연기파, 양극단의 찬사를 거머쥔 배우 유아인
자랑 하나만 해도 될까. 나 유아인이랑 누나 동생 하는 사이다. 친한 사람들 말처럼 ‘쟨 지가 스탄 줄 알아’서 그러는 건 아니고, 희한하게 난 잘나가는 연예인을 봐도 멋있다거나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잘 안 든다. 연예인 섭외 능력이야말로 에디터의 필수 능력 중 하나로 여겨지는 작금의 잡지계에서 ‘섭외 못하는 대신 일 더 많이 하면 되잖아?’ 하는 생각으로 12년을 버텼달까. 이 이야기를 이토록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유아인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독자들이 피부로 느끼게 하고 싶어서다. 지난 12년 동안 나라는 사람이 패션 에디터로 일하면서 석달에 한명꼴로만 계산해도 쉰명은 족히 넘는 스타들을 만났는데 그중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유아인뿐이었다면 어떤가? 유아인이 얼마나 매력적인 청년인지가 확 와닿지 않나? 잘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인터뷰를 읽고 직접 느끼시는 수밖에.
-<완득이> 할 때, 막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옷차림이 아니어서 인상적이었어.
“어떻게 하면 못 입을 수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어. 그것도 스타일링이거든. 그냥 못 입는 게 아니라 못 입는 걸 스타일링 하는 거지. (옷 잘 입는 배우가 옷에 관심 없는 역 하기도 힘들 거 같아.) 근데 나는 연기할 때는 예쁘게 보이고 멋있게 보이고픈 욕망이 없어. 사실 아주 못생긴 나의 표정이 <완득이>에서 몇 번 나오거든. 난 그런 걸 아주 좋아해. 그런 건 나한테만 있다고 자부해. 보통 내 또래 연기자들이 내가 얼마만큼 얼굴을 망가뜨릴 것인가, 일그러진 표정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 리미트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한단 말이야. 나한테는 그런 벽이 없어. 그래서 그런 표정 보고 “어머, 유아인 너무 못생겼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웃음) 난 그 소리가 아주 좋아.”
“어떤 무엇이어야 될 필요가 없어.
어떤 벽이나 틀 안에 굳이
나를 가둘 필요는 없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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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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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찍고 있는 <패션왕>에서는 ‘완득이’와는 완전 반대일 텐데….
“응, 의식적으로 옷을 예쁘게 입는 애라는 걸 드러나게 해야 돼. 그래서 뭔가를 많이 걸치고 더하지.(웃음) ‘멋 부리는 애’ ‘동대문에서 옷 장사 하는 애’라는 걸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세련된 옷차림보다 장식적인 요소를 계속 더하는 거야. 초록색 티셔츠가 소매와 밑단으로 나오도록 한 다음 붉은색 니트를 입고, 그 위에 멜빵도 하고, 그 위에 또 머플러를 한번 더 걸치는 식으로.(웃음) 좀 전에 이야기한 표정처럼 스타일에서도 나는 리미트가 없어. 사실 내 스타일이 없는 게 내 스타일이야. 나는 정말 일본 스트리트 힙합 브랜드 옷도 사 입고, 질 샌더나 지방시, 발렌시아가 같은 하이 패션 브랜드 옷도 입고, 동대문 옷도 입고, 인터넷에서 예쁜 게 있으면 또 사 입고…. 예쁘기만 하면 돼. 어떤 무엇이어야 될 필요가 없어. 어떤 벽이나 틀 안에 굳이 나를 가둘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영화를 보는 취향, 사람을 보는 취향, 책을 보는 취향, 그림을 보는 취향, 모든 게 마찬가지야.”
-예를 들어 성격은 각양각색이지만 진실한 사람끼리는 잘 통하는 것처럼?
“응, 그럼요. ‘꼭 이래야 한다’고 스타일을 규정하지 않는 건 무척 중요해. 가령 ‘나는 인디음악을 좋아해’라고 규정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여러 ‘나’ 중 어떤 하나가 이야기해.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는 구려. 촌스러워. 듣지 마!’ 근데 사실 아이돌 음악이 좋을 때도 있거든. 그래서 나는 나한테 ‘괜찮아’라고 허락해주는 거야. 내 안의 여러 나가 좋아하는 다양한 스타일을…. 대개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이라는 틀에 갇혀서 내 취향이 아닌 것들을 ‘디스’하잖아?(웃음) 내 스타일을 정해 놓고 다른 것들을 이상한 걸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신의 취향을 보호하려고 한단 말이야. 나는 그게 아니야. 나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요것도 좋고, 다 좋아.(웃음) 그냥 어떤 선명도, 깊이, 농도의 차이인 거지, 어떤 컬러이냐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 빨강도 있고, 파랑도 있고….”
-근데 내가 너라면 그런 게 되게 싫을 것 같더라. 패셔니스타들은 연기파가 아니라는 인식….
“응, ‘패셔니스타는 연기파가 아니다’라는 인식의 확장적인 예가 뭔 줄 알아? ‘겉모습에 관심 가지는 애들은 가볍다!’ (맞아! 그런 인식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무슨 생각이 있어? 개소리지. (잠시 생각) 근데 사람들이 가진 의식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없어. 포기할 부분은 포기해야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웃음) 나는…, 나는 나로서 증명할 뿐이야. 내 행위로, 행동으로, 작품 활동으로, 혹은 말들로 그냥 나라는 사람으로 다르다는 걸 보여줄 뿐이야.”
“다 됐어, 해냈어, 이뤘어,
라고 생각하는 나만 아니면
다 좋은 거 같아”
-아까 여러 개의 ‘나’가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 여러 모습 중에 정말 싫은 ‘나’도 있어?
“‘다 왔다’고 생각하는 거. ‘다 됐어’라고 생각하는 거.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거.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 3, 40대에 완성된다’고 하잖아. 근데 누구 맘대로 완성이래. 사실 완성은 지금이야.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완성형은 지금이라고. 나한테 내일이 없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완성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럼 발전이 없으니까. 다 됐어, 해냈어, 이뤘어, 라고 생각하는 나만 아니면, 다 좋은 거 같아. 난 굉장히 불안한 사람이거든. 항상 불안해. 남이 완성됐다고 보는 것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지금도 미래도 모든 게 다 불안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들도 잘하고 있는 건가 불안하고… 결국 불안이 나를 만들고, 나를 이끌어가는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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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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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마음도 머리도 아주 가벼웠다. “옷장에 청바지는 몇 벌?” “가장 최근에 산 옷은 어느 브랜드, 얼마짜리?”처럼 진짜 궁금한 거나 실컷 물어보자, 생각하며 룰루랄라 그를 만나러 갔다. 인터뷰를 위한 사전 조사? 그런 걸 내가 왜 해? 나는 그를 이미 너무 잘 아는데…. 근데 그랬다가 크게 두 방 먹었다. <패션왕>을 찍고 있다기에 “여자 주인공은 누구야?”라고 물었다가 한 방 먹었고(“누나, 인터뷰를 하려면 인터넷에 이름 정도는 한번 검색해보고 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또 한 방 먹었다(인터뷰 도중 그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개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뭔가에 정말 머리를 세게 가격당한 것처럼 어지러웠다). 나름대로 순발력을 발휘해 첫번째 한 방은 얼렁뚱땅 무마하고 넘어갔는데(“나 그런 거 물으러 온 거 아니거든? 난 오늘 스타일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니가 요즘 누구랑 무슨 드라마를 찍는지를 들으러 온 게 아니고…”) 두번째 펀치는 그 충격의 여파가 지금까지도 가시질 않는다. 도대체 나는 무슨 근거로 유아인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나저나 결국 정말 궁금했던 질문(“옷장에 청바지는 몇 벌?” “최근에 산 비싼 물건은 얼마짜리?”)은 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인터넷 검색 한번 안 해보고 인터뷰를 하러 갔단 사실보다 그게 더 부끄럽다. 옷에 대해 쓰고 말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면서도 어쩌면 나는 ‘옷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직접적으로 그걸 드러내는 건 가벼운 짓’이라 여기는 게 아닐까? 아아, ‘개소리!’라고 말할 때의 유아인처럼 그런 나 자신을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확고해져야 하는 것일까? (또 한번) 그나저나 만나기 전엔 확고한 줄 알았던 내 생각들에 의구심이 들고, 만나기 전엔 궁금하지 않던 것들까지 더 궁금해졌다면 이것은 실패한 인터뷰일까, 성공한 인터뷰일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그나저나 유아인은 정체가 뭐지? 잘 알던 사람이 갑자기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참으로 이상야릇한 순간.
심정희 스타일리스트,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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