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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29 18:35 수정 : 2012.02.29 18:35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방콕의 장마철에는 매일 밤 한번씩 국지성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다. 사실 소나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근육질 비구름은 한 시간도 안 돼 홀쭉이가 되어 맑은 하늘을 드러내고 만다. 그날도 나는 늦은 밤 방콕을 향하며, 행여 이 소나기와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 구름 떼는 아직 공항을 뒤덮지 않았지만 바람을 타고 서서히 우리를 마중하러 나오고 있었다. 물론 전혀 고맙지 않았다. 속도를 밟았다. 교통이 한가한 밤중이라 관제사도 속도제한을 풀어주었다. 딱지 뗄 걱정 없이 한껏 날아온 덕분에 어느새 공항 코앞까지 다 왔다. 구름이 다가오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시정이 좋아서 활주로 조명은 선명하게 반짝였다. 나는 자동 조종장치를 해제하고 조종간을 가볍게 쥐었다. 이제 곧 착륙하고 나면 호텔 앞 식당에서 맛있는 타이 음식을 마구마구 섭취해 주리라!

활주로 전 약 3마일(약 6㎞) 지점을 1000피트(300m) 정도로 통과할 때, 뜻밖에도 관제탑에서 생뚱맞은 말을 했다. “대한항공 661편, 착륙을 허가한다. 활주로에 강한 폭우가 내리고 있으니 주의하라!” 조종실 창문에는 물 한방울 떨어지지 않는데 폭우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황당함은 곧 현실이 되었다. 활주로 조명이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400피트 정도가 되자 억수 같은 비가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와이퍼를 고속으로 움직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럴 땐 자동 착륙을 하는 것이 옳지만, 이제 30초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미 늦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장대비에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마치 비행기가 급하게 가라앉고, 좌우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속이 메스꺼웠다. 얼른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장이 멀미로 조종간에 토하면 이거 정말 해외토픽감이 아닌가?

부드러운 착륙을 위해서는 활주로 노면이 다가옴에 따라 조종간을 당겨 강하율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폭우로 시야가 흐려지니 땅이 다가오는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없었다. 이제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감으로 느껴야 한다. 고도 경보가 지면이 다가왔음을 알려주자 리드미컬하게 조종간을 당겼다. 그러나 도대체 어느 정도로 얼마나 당겨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거기서, 조금 더! 0.5° 정도면 돼! 바로 지금!’ 나는 의심 없이 스스로의 명령에 따랐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덤덤히 착륙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비행기가 땅에 닿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부드럽게 착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행이 끝난 후 조종실에서 한참 동안 계기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거니? 네가 말해 준 거니? HL7525(항공기 고유번호)야, 너 정말 멋지게 잘 나는 녀석이구나!’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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