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14 17:52
수정 : 2012.03.14 17:52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오늘은 중국 광저우를 다녀오는 비행. 새벽잠 설치고 부산 떨며 일하다 보니 어느덧 상하이를 지나 광저우 관제공역에 들어왔다. 그런데 관제사의 대꾸에 순간 약이 오르고 기분이 나빠졌다. 말도 잘 알아듣기 힘든데, 내 콜 사인 ‘KE865’를 부를 때마다 마치 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코이앙에어 에이-씩-파이, 텬 롸이 헤링 틔-틔-시로우!”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일단 대충 들은 대로 대답하니 관제사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네거티브, 코이앙에어 에이-씩-파이 헤링 틔-틔-시로우!” “컨펌 헤딩 쓰리-쓰리-제로?” “코이앙 에이-씩-파이! 네거티브! 네거티브으! 트! 틔! 지로우!” 이제는 소리까지 지른다. “광저우, 헤딩 투! 쓰리! 제로!?” “코이앙 에이-씩-파이, 코렉트!” 젠장, 처음에 투-쓰리-제로라고 맞게 대답했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우리는 억울하게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오랑캐가 되어 착륙할 때까지 관제사의 미움을 받아야 했다.
가끔씩 이렇게 강한 중국식 영어 억양을 들으면 난감하다. 숫자 2는 “트”, 3은 “틔”로 들리는데, 차이점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더 심한 경우, 숫자 6도 “틱”이라 발음하는데, 처음에는 “트”, “틔”, “틱” 다 똑같이 들린다.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출발이 지연되었다. 홍콩, 선전과 인접한 광저우는 러시아워에 출항 허가를 제때 받기가 쉽지 않다. 관제사에게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니 20분이라고 했다. ‘그 정도면 심하지 않아!’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승객들에게 ‘20분 지연’이라고 자신있게 방송을 했다. 그러나 20분이 지나도 관제사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고, 나는 승객들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인내를 잃은 내 질문에 관제사의 대답은 짤막했다. “스탠드바이!”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20분이 지났다!” 이번에는 아예 대꾸도 없었다. 초조해진 내가 자꾸 관제사를 다그치자 결국 그가 대답했다. “앞으로 한 시간 지연이오.” 순간 욱하고 올라왔다. “이유가 뭔가?” 그러나 또 묵묵부답. 나는 다시 기내방송을 해야 했다. 승객들의 야유가 두꺼운 조종실문 사이로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고작 10분이 지나 관제사가 대뜸 우리를 불렀다. “대한항공 866편 출항을 허가한다. 지상 관제사와 교신하라.”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승객들에게 알렸다. 아마도 내가 자꾸 다그쳐서 홧김에 1시간 지연이라고 엄포를 놓았나 보다. 하지만 이내 곧 보내주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 그리 모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출발하면서 그 밉상 관제사에게 인사를 건네보았다. “생큐, 굿-데이. 시에 시에!” 그러자 지긋지긋했던 중국식 억양이 난데없이 기분 좋게 들려왔다. “구-데이, 아-녕-하-셰-요!” 그래. 이 맛에 비행한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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