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16 17:43
수정 : 2012.05.16 17:43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유니폼은 봉사(서비스)를 상징한다. 봉사란 나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의로운 일이다. 따라서 유니폼에는 권위가 배어 있으며, 봉사 정신과 권위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에게 유니폼을 입게 한다.’
뭐, 이런 건 이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들린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유니폼을 입고 일하지만, 돈이 권위와 권력을 움켜쥔 사회에서 서비스란 그저 대가를 받고 하는 심부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좀처럼 말을 걸지 않는 한국 사람도 유니폼을 입은 사람에게는 당당하게 말을 걸어 온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경찰관에게 편하게 길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 경찰관은 큰 랜턴을 내 얼굴에 비추어 시야를 가린 채, 권총 홀스터에 손을 얹어 언제든 나를 제압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다소 충격적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날도 나는 유니폼을 입고 비행을 나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노량진 가는 버스는 어디서 타요?” 아마도 내가 버스기사로 보였나 보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 답변이 불만스러웠는지, 그는 언짢은 얼굴로 휙 돌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볼일이 있어 잠시 은행에 들렀다.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이번에는 어느 노부인이 오셔서 번호표를 어디서 뽑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번호표를 뽑아드리자, 이번에는 뭔가 서류 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셨다. 나는 은행 직원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며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날 무섭게 쳐다보시면서 이 은행 서비스가 좋지 않다며 나무라셨다.
자주 겪는 일이라 다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다. 함께 비행 가는 부기장을 만나 출국장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어떤 젊은 부인이 내 소매를 붙잡고 말을 걸어 왔다.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얼굴은 지쳐 보였다. “우리 은숙이 비행기 탔나요?” “네?” 질문이 당혹스러웠다. “우리 딸 은숙이 비행기 탔냐고요?” 눈치 빠른 부기장이 내게 ‘머리에 병이 있는 분 같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따님이 어디로 가시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하늘나라요.” 순간 가슴속에 돌무더기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디 앉아 손 붙잡고 슬픈 사연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허리를 구부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해 주었다. “네, 은숙 손님은 비행기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떠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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