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6.13 18:16
수정 : 2012.06.13 18:16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만남은 소중하고, 소통은 영감을 준다.’ 좋은 말이지만 조종사와는 연관이 없어 보인다. 조종사는 좁은 조종실에 갇혀 일해야 하는데, 객실과의 사이는 무거운 철문이 가로막고 있다. 조종사는 승객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고, 휴식을 할 때도 조종사가 아닌 척 변장해야 한다. 9·11 테러 이후 만들어진 보안 절차다.
깡통 속의 나는 항상 객실이 궁금하다. 무지개 끝을 상상하듯 승객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하늘에서 만난 그들과의 인연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비행이 끝난 후 창문 너머로 떠나는 승객들을 바라볼 때, 나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을 느낀다.
승객과의 유일한 소통은 ‘기장방송’이다. 아무 의미 없는 일방통행일지 몰라도, 방송으로나마 솔직하고 친근하게 대화하려 노력한다. 한번은 일본인 승객만 가득 태운 전세기를 운항한 적이 있다. 나는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일본어 방송이 결코 쉽지는 않다. 더구나 나는 어릴 적에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일상 대화에서 잘 쓰지 않는 방송용 극존칭어를 쓰면 왠지 손이 오글거려 발음이 꼬인다. 그날따라 방송 욕심이 지나쳐 과도한 존칭을 남발하였다. 방송사고는 마지막 작별인사 중에 나오고 말았다.
“마타 지카이 우치니(다시 가까운 시일에), 미나사마토(여러분과) 오메니카카…(만나뵐 수…)” 그때 갑자기 “카카”라는 연속된 경음에 그만 말이 체하고 말았다. “카카…카카… 레.마.스.요.오(만나…만나…뵐.수.있.기.를)” 고비를 넘긴 듯했으나 이번에는 머리가 하얘졌다. “-5초간 정적-오타노시미니(즐거운 마음으로), -또 5초간 정적-오마치도시테(기다리고), -또 5초간 정적-오리마스(있겠습니다)!” 계속해서 뭔가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 “니혼고 무즈카시이데스네(일본어 어렵군요.) 도니카쿠(어쨌든), 마타 아이마쇼!(또 만나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행기가 도착하여 손님들이 모두 내리자 나는 창피한 마음에 도망치듯 가방을 챙겨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그때 누군가 나를 급히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함께 탑승했던 일본인 여승무원이었다. “기장님! 승객들이 다들 즐거워했어요. 특히 ‘또 만나요!’ 라고 말할 때 모두 박수 치며 크게 웃었어요.” 혹시 불만레터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뜻밖에 반전이었다. “손님 한 분이, 기장님께 열심히 일본어로 말해줘서 고맙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기장님 또 만나요!” 승객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그래, 이들이 바로 항상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최고의 손님들이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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