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11 18:02
수정 : 2012.07.11 18:02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을 향해 출발하기 위해 출항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객실 사무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기장님, 승객 한분께서 좀 아프신 것 같아요. 못 가겠다고, 비행기에서 내려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글쎄, 일본 분이신데 전혀 영어를 못하셔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기운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외상도 없고 심각해 보이지는 않으니 일단 설득을 해보겠습니다.”
출발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승객이 자발적으로 비행을 포기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그 승객의 짐을 내려야 함은 물론이고, 다른 승객들까지도 모두 비행기에서 내리게 한 다음 기내 보안검색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폭발물 테러에 대비한 보안절차 때문인데, 승객들의 불편은 물론이고 한 시간 정도 출발 지연이 불가피하다. ‘몸이 아프면 처음부터 신중하게 여행 준비를 했어야지, 이제 와서 못 가겠다고 하면 어쩌라고?’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싶어 답답했지만, 일단 사무장이 알아서 잘 처리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엔진 시동을 모두 걸고 비행기를 막 움직이려 하는데 사무장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기장님, 안 되겠습니다. 승객이 완강하게 내리기를 원합니다.” 순간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수를 돌려 게이트로 다시 돌아갔다. 승객들에게 보안검색을 위해 짐을 가지고 모두 내려달라는 방송을 할 때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승객들의 탄식과 야유가 불 보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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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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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난 뒤, 조종실에서 나와 휠체어를 기다리는 환자에게 가보았다. 내가 일본말을 조금 하니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기 위해서였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대책없는 승객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나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 환자를 본 순간 저항할 수 없는 쓰나미가 내 마음을 강타했다. 그 여성은 공포에 질린 채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고, 그 옆에선 남편이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덴칸데스.” 남편이 조용히 대답했다. ‘덴칸’이란 우리말로 ‘간질병’이다. 아직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말을 안 들을 때 ‘땡깡 부린다’는 말을 쓰곤 한다. 일본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미를 안다면 그렇게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이다. 남편이 말하기를, 아내의 마지막 발작은 2년 전이었는데 지금 그때와 똑같은 기운을 온몸에서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휠체어가 도착하였고 남편은 ‘스미마센’을 연발하며 그녀를 데리고 비행기를 떠났다. 그러나 정말 미안한 것은 나였다. “꼭 쾌차하셔서 모차르트 보러 오셔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내 비행기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꼭 지킬 것이다. 비록 모두가 불편하더라도 꼭 설득하겠다. 이 좁은 비행기에 함께 모여 앉게 된 것이 어디 보통 인연인가 말이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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