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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0.24 18:07 수정 : 2012.10.24 18:07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15년 전 늦은 가을, 드디어 수습 부기장이 된 나는 처음으로 세계 곳곳을 날기 시작했다. 노선 경험을 위해 첫 비행을 간 곳은 미국 알래스카의 앵커리지였는데, 하늘에서 바라본 알래스카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붉게 노을진 하늘 아래에는 차가운 바다가 흐르고, 멀리 험한 산을 타고 빙하도 함께 굽이치고 있었다. 눈 덮인 숲에는 침엽수들이 촘촘히 박혔고, 작은 마을에는 마치 산타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도착 후 처음 만난 앵커리지의 공기는 뼛속까지 차가웠지만, 산소 가득한 신선함이 내 폐 속을 말끔히 청소해주는 듯했다. 늦지 않은 오후였지만 벌써 해가 져서 검은 하늘에는 보석들이 초롱초롱 박혀 있었다. 호텔로 가기 위해 밴을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자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이 나왔다. 밴은 바퀴에 감은 스노체인 때문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이 나타날 즈음 갑자기 운전사가 “젠장!” 하고 소리치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육중한 밴은 좌우로 비틀거렸고 몸이 앞으로 강하게 쏠렸다. 차가 멈춘 뒤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가슴을 마구 뛰게 했다. 차 앞에 무스(북미지역에 서식하는 큰 사슴) 세 마리가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던 것이다. 그중 수컷은 집채만큼이나 커 보였고 화려한 뿔은 마치 나무를 심어놓은 듯했다. 암컷 역시 몸집이 거대했는데, 그 옆에는 새끼 한 마리가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자동차 전조등에 비친 새끼 무스의 털은 갈색으로 윤기 있게 빛나고 우리를 쳐다보는 커다란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울철 숲 속에 먹을 것이 모자라면 녀석들이 가끔 마을로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집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운전사가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나는 새끼 무스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뭔가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무스 가족은 홀연히 숲 속으로 사라졌고 우리도 다시 호텔을 향해 출발했다. 흐릿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홀로 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무스의 모습은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같았다.

새롭게 출발하는 곳에는 항상 아름답고 소중한 만남이 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그 만남을 떠올려 다시 용기를 얻는다. 내가 처음으로 자연과 홀로 만난, 그리고 그 속에서 맑은 눈을 가진 내 모습을 발견한 그 순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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