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2 18:16
수정 : 2013.01.02 18:16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참 신기하게도 눈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눈만큼 사람을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군대에서 함박눈이 내리면 장병들은 신이 나 눈밭을 뒹굴기도 하고, 때론 감상에 젖어 연인의 편지를 다시 꺼내 보기도 한다. 당장 닥쳐올 고된 넉가래질의 고통마저 마취시켜 버리는 저 눈 속에는 마법이 숨어 있는 것일까?
3년 전 이맘때 나는 인천공항에서 눈폭탄을 맞은 적이 있다. 밤새 무릎까지 눈이 쌓이고도 모자라 오전 내내 함박눈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쯤 되면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워크로드는 평소의 열배, 스무배가 된다. 눈과 싸우는 사람도, 교통을 정리하는 사람도, 손님을 응대하는 사람도 모두 전쟁터의 외로운 라이언 일병이 된다. 4시간이나 늦게 겨우 게이트를 출발했지만, 아직도 땅에는 출발하는 비행기들이 거북이걸음을 걷고 있었고 하늘에는 착륙 순서를 기다리는 비행기들이 배고픈 소리개처럼 공항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승객들의 불만도 점점 극에 다다랐다. “눈도 많이 그쳤는데, 왜 안 가느냐? 항공사가 대처를 잘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자동차와 달리 비행기는 날씨가 좋아지면서 본격적으로 교통체증이 시작된다. 날씨 때문에 이착륙하지 못하던 비행기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닌 듯했다.
손님 처지에서 보면 모처럼 비싼 돈 들여 손에 쥔 비행기표가 아깝고 억울하겠지만, 일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래도 이들이 부럽다. 화를 낼 여유라도 있으니 말이다. 조종사는 넋두리하고 짜증 낼 여유조차 없다. 미끄러운 활주로, 밀어붙이는 바람, 앞이 잘 안 보이는 나쁜 시정, 날개 위에 쌓이는 눈, 신경 쓰이는 일과 해야 하는 절차가 수도 없이 많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내 승객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5시간 만에 드디어 어두운 구름을 향해 눈보라를 뚫고 올라갔다. 그런데 정말 마법이 있는 것일까? 온몸에 마취가 퍼지는 듯했다. 지긋지긋했던 눈과의 사투를 잊은 채, 발밑에 보이는 하얀 세상을 따듯한 눈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곧 어두운 회색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을 오랫동안 날았다. ‘이것이 고생의 결말일까?’ 마법이 힘없이 내 몸을 떠나려는 순간, 비행기는 범고래처럼 깊은 구름의 바다를 뚫고 하늘로 높이 솟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티끌 하나 없이 맑은 하늘과 따듯한 태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이래야 진짜 해피엔딩이지!’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