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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13 21:00 수정 : 2013.02.13 21:00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여행하는 것이 일이다 보니 이제는 가방 싸는 데 도사가 됐다. 사나흘 다녀오는 비행 가방쯤은 10분이면 쌀 수 있고, 오랜 노하우로 꾸려진 서바이벌키트가 완성된다. 호텔에 도착해서도 짐은 최소한만 풀어놓는다. 옷가지는 항상 가방 안에 두고, 세면도구는 가능한 한 호텔 것을 쓴다. 책, 컴퓨터나 귀중품 등도 테이블 한곳을 정해 함께 모아 둔다. 그래야 갑자기 짐을 싸도 잃어버리는 물건이 없다.

가끔 가족여행을 하면 짜증이 난다. 아내는 여행 일주일 전부터 짐을 싸기 시작하는데, 이것저것 넣다 보면 가방은 점점 커진다. 먹거리 한 보따리도 모자라 그릇까지 챙기는 것을 보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싸움을 건다. “외국에 가면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아내도 지지 않는다. “내버려 둬, 짐 싸는 건 내 취미야!” 호텔에 도착하면 아내는 짐들을 모두 꺼내서 다시 정리한다. 나 같으면 열어보지도 않을 옷장 서랍에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고, 화장실에 세면도구와 화장품들을 정렬한다. 냉장고 주변은 우리 집 부엌이 고스란히 이사를 왔다. 나는 절대 도와주지 않고 못마땅한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나가버린다. 하지만 여행의 달인이라고 자부하는 나도 가족여행에서는 매번 굴욕을 맛본다. 고추장 비벼 김 싸먹는 뜨거운 쌀밥, 설익은 라면에 시큼한 김치, 꾹꾹 쑤셔 담아 온 밑반찬들. 아내가 차려준 여행 밥상보다 더 맛있는 요리는 세상에 없다. 밤에 가족들과 침대에 누우면 시차도 아랑곳없이 잠은 잘도 온다. 당연하지 않겠나? 아내가 우리 집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 말이다.

하루는 서울을 향해 새벽노을을 보며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휴식을 마친 뒤 먼저 근무하던 동료 기장과 교대를 하는데, 어이없는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 기장이 하얀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보라색 실크 파자마를 꺼내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기장님! 잠옷을 가지고 다니세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신 기장, 나는 이거 없으면 못 자! 베개를 갖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 농담이 아니라 나도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볼 일이었다. 강한 맞바람에 비행기는 가는지 서 있는지 모르겠고, 하늘이 노랗게 물든 지는 몇 시간이 지났는데 해는 아직도 안 떠오른다. 충혈된 눈 비비며 한숨 한번 크게 쉬니 집이 더 그리워진다. 실크 잠옷을 입은 동료 기장은 이제 가족들 꿈꾸며 단잠을 자겠지. ‘거의 다 왔다, 조금만 참고 기운을 내자!’

여행이 즐거운 것은 새로움을 향한 호기심과 집을 향한 그리움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돌아갈 곳이 없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과연 아름다운 비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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