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3.13 22:33 수정 : 2013.03.13 22:33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이렇게 조종사가 되어버렸으니 비싼 대학 등록금만 아깝게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지겹도록 공부했던 내 어린 시절이 억울하다. 참고 또 참으며 바라보았던 목표가 ‘좋은 대학’이었는데, 그 잘난 대학이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모두 부질없는 헛고생이었단 말인가?

얼마 전 부기장이 착륙을 하는데, 활주로 위로 부드럽게 강하각을 줄였는데도 생각보다 착륙의 충격이 컸다. 부기장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기장님, (비행기를) 잘 가져다 붙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세게 닿는 거죠? (엔진) 파워를 좀더 늦게 줄였어야 하나요?” 나는 대답해 주었다. “아니, 파워를 더 일찍 줄였어야 해. 좋은 각도로 잘 갖다 붙였는데 생각보다 충격이 큰 것은 그만큼 비행기의 에너지가 크기 때문이야. 공을 바닥에 세게 던질수록 반동이 더 커지는 것과 같은 이치지. 더 부드럽게 닿으려면 속도를 빨리 늦추어 비행기의 에너지를 줄였어야 해.” 나는 어느새 어릴 적 물리 시간에 배웠던 위치에너지, 운동에너지, 그리고 무게, 속도와 힘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비행하다 보면 어릴 적 공부했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는 일이 많다. 뒷동산에서 보물찾기 하듯 잊고 있었던 지식이 새록새록 떠올라 재미가 있다. 옛날에 ‘내 평생 과연 이 단어를 쓸 일이 있을까?’ 하며 외웠던 영어 단어를 말하게 되고, ‘이걸 왜 알아야 하는 거야?’ 했던 삼각함수 공식을 각도와 거리 계산을 하는 데 요긴하게 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굽이굽이 흐르는 산과 강을 바라보면 화산활동이 어떻게 지각을 움직였는지, 침식과 퇴적이 어떻게 우각호와 삼각주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세계 여러 도시를 돌아보며 역사와 문화의 속뜻을 알게 되고, 왜 그 나라의 문학과 미술이 다른지, 심지어 왜 그곳 음악에 쓰이는 음계가 독특한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잘살고 못사는 나라를 다니며 법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중요함도 깨닫게 된다. 하나같이 어릴 적 교과서에 밑줄 쳐 가며 지겹게 외웠던 지식들이다.

오직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자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여,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지식이란 없다. 여러분이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는 그 많은 지식이란, 하나하나가 모두 학자들의 피와 땀이 밴 값진 유산이다. 단지 수능문제로 출제되기 위해 만들어진 그런 싸구려가 아니란 말이다. 보고 느끼고 영감을 얻으며 공부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텐데, 그래서는 좋은 수능성적을 장담할 수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신 기장의 야간비행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