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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14 17:41 수정 : 2012.03.14 17:41

[매거진 esc] 기계적 삶

내비게이션의 배신과 해코지, 그리고 나의 사죄

그분은 참 까칠하다. 그분의 괴팍한 성격은 나를 곤란에 빠트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매번 진땀을 빼게 한다. 그날 날씨와 습도, 심지어 전날 컨디션 따라 달라지는 그분의 태도 탓에 나와 아내는 늘 그분의 눈치를 보고 산다.

그분, 내비게이션 님을 만난 건 4년 전이다. ‘차량 구입 시 내비게이션 무료 장착’을 외치던 중고차 시장 영업사원이 우리의 인연을 맺어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멋스러운 빨간 테두리를 두른 내비게이션은 날렵한 터치감과 신속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신호 수신을 자랑했다. 낭랑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전방에 과속 주의 구간”이라며 과속 카메라를 알려주던 그분은 진정 도시생활의 길잡이요, 나들이의 동반자였다.

그렇던 우리 사이가 멀어진 결정적 계기는 3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붓던 밤, 내비게이션은 띵띵띵 경로 이탈음을 내며 우왕좌왕했다. 심지어 습한 날씨 탓에 앞 유리창에 붙어 있던 내비게이션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렇다. 그때 참았어야 했다. 앞도 안 보이는데, 길까지 잃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내비게이션을 뒷좌석으로 내동댕이쳤다. “멍청한 내비게이션, 꼴도 보기 싫다”며 폭언과 함께 뒷좌석에 있던 내비게이션을 다시 트렁크 깊숙이 처박았다. 그렇다. 그분은 그렇게 여섯달을 어둠 속으로 임하셨다.

김성환 기자
한참이 지나, 길 찾는 불편함에 문득 내비게이션을 다시 꺼냈다. 반성의 기미가 보이는 듯 내비게이션은 예전처럼 낭랑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건 복수의 서막에 불과했다. 평소에 멀쩡하다가 고속도로 이동카메라 앞에서만 침묵하던 내비게이션은 우리에게 7만원짜리 과속 딱지를 무려 두번이나 선물했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 취재길에서는 목적지 1㎞를 남기고 자꾸 서울로 길 안내를 시작했다. 두 손으로 화면을 꼬옥 잡고 어르고 달래 봤지만, 복수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겨울에는 엉뚱하게 터치스크린의 1㎝ 옆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통합검색’을 누르려면, 그 옆 버튼인 ‘최근 검색’을 조심스레 눌러야 했다. 그 탓에 우리는 얇은 볼펜 끝으로 화면을 누르는 ‘극세사 터치’ 신공을 익히게 됐다!

터치스크린을 적용하고 있는 내비게이션에는 정전식 또는 정압식 터치패널을 쓰고 있다. 화면을 덮고 있는 투명 패널에는 두개의 얇은 판막이 덧대어 있는 것이다. 판막 위에 전류가 통하는 물질이 닿으면 반응해 신호를 인식하는 원리다. 정전식과 정압식의 차이는 휴대전화의 햅틱과 갤럭시의 차이다. 서비스센터에 물어보니 “강한 충격이나 급격한 날씨 변화 등 터치패널이 오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양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민감한 기계이니 곱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주 뉴스에 태양 흑점이 폭발해 내비게이션이 오작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위성위치 추적 장애가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그래, 3년 전 여름밤 네가 그렇게 길 찾는 데 헤맸던 건 네 잘못이 아닐 수 있겠구나. 내비게이션아, 아니, 내비게이션님, 제가 잘못했으니 이제 그만 화 풀어요. 올 한해 제발 잘 좀 부탁드릴게요.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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