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02 18:09
수정 : 2012.05.0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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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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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기계적 삶
이제는 골동품 된 유에스비(USB) 저장장치
“이거 2기가바이트(GB)짜리야. 동영상 두 개는 거뜬히 들어갈걸.”
5년 전, 후배가 취직 기념 선물이라며 ‘유에스비(USB) 저장장치’를 건넸다. 후배는 256메가바이트(MB) 엠피3(MP3) 플레이어에 이력서, 자기소개서, 그리고 각종 잡다한 파일을 구겨 넣고 다니던 내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고 했다.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는 다소곳이 누워 있던 무광택 검정색의 유에스비 저장장치를 보면서 잠시나마 이런 상상에 잠기기도 했다. ‘요 작은 놈 안에 화려한 특종 자료를 꾹꾹 채워 넣으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 유에스비 저장장치를 대하던 내 태도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이 1기가바이트 하드디스크 달린 펜티엄 컴퓨터를 보며 놀라던 모습과도 어딘가 닮아 있다. 그러나 ‘특종 유에스비’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찰서를 전전하던 수습기자 생활 중, 쓸데없는 파일만 가득했던 유에스비 저장장치와는 서울 종로 어느 피시방에서 원치 않게 이별했다. 나의 ‘특종 유에스비’를 피시방 컴퓨터에 덩그러니 꽂아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몇 년이 흐르면서, 내 서랍 속에는 이름 없는 유에스비 저장장치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각종 행사의 이름이 적힌 기념품에서부터 자료를 건네받기 위해 받았던 유에스비 저장장치(그리고 돌려주지 않았다! 준 사람도 찾지 않았지만)까지…. 책상 서랍 안에는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다양한 모양과 제각각 색상의 유에스비 저장장치가 엉겨 있었다. 그러나 16기가바이트의 스마트폰, 그리고 ‘에버노트’ 따위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쓰면서, 유에스비 저장장치는 오래전 5.25인치 플로피디스크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전원이 끊겨도 저장된 정보를 기억하는 ‘플래시 메모리’인 유에스비 저장장치는 ‘유에스비’라는 전자제품 표준 규격이 생기면서 탄생한 제품이다. 과거에는 500메가바이트~1기가바이트 수준이었지만, 기술 발달로 이제는 16기가바이트, 32기가바이트 제품도 흔하다. 이제는 서랍 속 유에스비 저장장치의 용량을 다 합친 것보다 큰 유에스비 저장장치도 많다. 이 때문에 예전에 쓰던 데스크톱 컴퓨터는 유에스비 입력 단자가 8개나 된다는 게 자랑거리였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서랍 속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유에스비 저장장치가 지금은 아버지의 작은 플라스틱 상자 안에 모여 있다. 아버지는 갈 곳 잃은 10여개의 유에스비 저장장치(사진) 안에 오래전 사진과 파일을 조금씩 담아 두셨다. 견출지로 제목도 써 붙이셨다. 마치 먼지 가득한 어릴 적 앨범처럼 유에스비 저장장치를 담은 플라스틱 상자가 책장 한켠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요즘에는 이게 대세”라며 건네드린 300기가바이트 넘는 외장 하드디스크도 한사코 마다하신다. 그래서일까. 한때 잘나갔지만 이제는 잘 빠진 외장 하드디스크에 밀려난 유에스비 저장장치가 가끔은 측은해 보이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몇 년 사이 유독 기운이 빠져 보이는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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